부정선거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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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선거의 유혹
  • 최동철
  • 승인 2016.03.17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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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대 선거 중에 들통 난 부정선거의 으뜸은 단연코 1960년에 치러진 ‘3·15 부정선거’라 할 수 있다. 혀를 내두를 정도의 무지막지 총체적 부정선거 획책에 국민을 마치 공깃돌처럼 여긴 듯 했다.

당시 집권당이던 자유당 정권은 5월 중에 실시될 제4대 대통령 선거 및 제5대 부통령 선거가 정당한 선거를 통해서는 전혀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관권을 동원한 엄청난 부정선거 계획을 세웠다.

때마침 야당인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신병치료차 미국 하와이에 건너간 틈을 타 일방적으로 선거일을 2개월이나 앞당긴 3월 15일 실시를 공고했다. 이에 귀국하던 조병옥은 급서했고 자연스레 이승만 후보의 4선은 확실시됐다.

문제는 이승만을 아버지라 부르며 후계자로 자처하던 부통령 입후보자 이기붕의 당선 여부였다. 급기야 이기붕은 그의 처 박마리아를 배후조종자로, 내무부장관 최인규, 정치깡패 임화수, 이정재 등을 하수인으로 내세워 부정선거를 감행했다.

내무부는 전국 각급 기관장에게 ‘4할 사전투표’ ‘3인조 공개 투표’ ‘완장부대 활용’ ‘야당 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기권자의 대리투표’ 등 구체적 부정선거 방법을 극비리에 지시했다.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해 자유당후보의 득표율을 85%까지 올리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음모는 정의감에 불타는 한 말단 경찰관이 ‘부정선거 지령서’ 사본을 선거일 전 민주당에 제공함으로써 백일하에 폭로됐다. 결국 선거 당일 마산에서는 의분을 참지 못한 시민과 학생들이 일어나 시위를 벌였다. 이름 하여 ‘3 ·15 의거’다.

의거로 명명된 것은 3 ·15부정선거에 항의하여 일어난 마산의 시민시위대와 경찰의 충돌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8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또 이를 계기로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데모가 전국적으로 확산돼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 ·19혁명의 도화선이 된 때문이기도 하다.

자유당 정권은 3월 17일 이승만·이기붕 후보가 80%가 넘는 높은 득표율로 당선되었음을 발표했으나, 대다수 국민들은 선거결과를 수긍하지 않았다. 결국 3 ·15 선거는 무효 처리됐다. 그리고 4월26일 대통령 이승만은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자유당 정권은 붕괴됐다.

4·13 총선이 20여일 앞으로 다가왔다. 예나 지금이나 선거 때는 부정선거 논란이 끊이질 않는다. 당선에 대한 집착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후보자들을 유혹하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은 간편하고 파급 효과가 빠른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이용한 ‘아니면 말고’식의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부정선거가 횡행한다고 한다. 고무신, 막걸리는 없어졌지만 변형된 부정선거가 판치고 있다. 남부4군 선거구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유권자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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