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년이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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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년이 저문다
  • 최동철
  • 승인 2015.12.31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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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제야의 종소리와 함께 을미년이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지는 날이다. 이제 육십년이란 세월이 흘러야 다시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서른 살 이상 연령대의 사람 대부분은 다음 을미년을 맞이하지 못할 것이다. 시간과 병마와 각종 사건사고에 구속당하게 되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을미년을 역사 속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분명 기억해 두어야할 몇 가지 사건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1080년 전인 935년 을미년은 신라가 멸망한 해다. 신라 경순왕이 신하들과 함께 고려 태조 왕건에게 투항하여 신하가 됐고 사위가 됐다.

천년 왕국 신라가 이처럼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된 원흉으로는 진성여왕이 꼽힌다. 사생활은 사치스럽고 문란했으며 정치는 무능으로 실정을 거듭했다. 참다못한 농민들은 붉은색 바지를 입고 ‘신라여, 여왕이여 제발 망하기를’ 빌고 빌며 봉기를 일으켰다.

해인사에서 발견된 최치원의 글에 당시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나라 안에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나지 않는 곳이 없다. 굶어 죽은 시체와 전쟁으로 죽은 해골이 들판에 별처럼 흩어져 있다’. 나라꼴이 이러했으니 어찌 멸망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120년 전인 1895년 을미년에는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주동이 된 일본 자객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했다. 불과 3개월 뒤에는 음력에서 양력으로 역법을 변경했으며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도 내려졌다.

고종황제의 칙령이기는 했으나 막후에는 일본과 친일파가 있었다. 고종황제의 상투는 당시 농상공부 대신이었던 정병하가 잘랐다. 대신이하 관리들은 서로 상투를 자른 후 가위와 칼을 들고 다니며 강제로 백성들의 상투를 잘랐다. 우리민족의 생활양상을 바꾼 일대사건이었다.

여하튼 올해 을미년도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의 자살과 그의 바지 주머니에서 나온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는 정치권을 뒤흔들었다. 메르스 발병은 온 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국민들은 정치를 걱정해야만 했고 기상이변은 연일 한반도를 덮쳤다.

보은군도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군수 직을 사수하고자 많은 재판과정을 겪어야 했다. 주민세를 10%나 인상했지만 여전히 재정은 열악했다. 재정자립도는 10% 미만이며 자체 수입으로 공무원 봉급조차 해결 못하는 자치단체 대열에 아직도 올라있다.

이 와중에 보은군수는 올 해도 서너 차례 외국을 다녀왔다. 예년처럼 벌어드릴 일 보다 쓸 일을 더 많이 챙겨왔다. 보은군의회 의원들은 집행부에 시행착오적 군정에 대해 시정을 요구하거나 비판을 가했지만 대부분 공염불에 그치고 있다.

대학교수들은 올해를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로 인해 세상이 온통 어지럽고 무도(無道)하다’는 의미의 사자성어 혼용무도(昏庸無道)로 표현했다. 오호 통재라! 잘 가거라. 을미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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