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전, 그 때의 소사(小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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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전, 그 때의 소사(小史)
  • 최동철
  • 승인 2015.08.13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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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모레면 광복 70주년이다. 이를 기념해 하루 전날인 14일이 임시공휴일이 됐다. 1945년 그 해 태어난 이른바 ‘해방둥이’들은 만 일흔 살이 된 셈이다. 옛날에는 사람이 70세를 넘기는 일은 흔치 않다고 하여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했다.

그래서 일흔 살을 고희(古稀)라고 부른다. 헌데 요즘은 고희에게 저승사자가 와서 부르면 ‘아직 이르다고 여쭈어라’하며 거부한다는 우스갯말이 나올 정도로 장년층의 연령대가 됐다. 어쨌든 일흔 살이 되면 집안일을 자손에게 맡기고 유유자적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광복 70주년을 맞은 우리나라도 이제 일본과의 역사적 악연과 흔적을 청산할 때 가 됐다. 응당 일본의 진정한 ‘죄송스런 마음의 표현’이 선행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또한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영향권에서도 벗어나 ‘이스라엘’처럼 작지만 강한 부국강병의 여유로운 나라가 되기를 학수고대해 본다.

70년 전 즈음까지 36년간 우리는 나라를 잃었었다. 하긴 반만년의 오랜 역사 중에 36년이란 시간은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하다. 다만 현재까지도 그 역사의 시간대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근대사라는 점에서 슬픔과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당시는 세계 2차 대전이 막바지에 다다른 때였다. 그 즈음 보은군의 역사를 훑어보면 대충 이러했다. 조선총독부가 보은군 지역에 농과 1학급을 인가하여 1944년 6월5일 잠견 공동 파내소에서 4년제 보은공림농업학교가 개교됐다.

군복 등 전쟁물자의 원자재로 조선총독부는 목화재배를 독려했다. 1944년 12월 충북 면양(綿羊) 장려회가 보은군 등 도내 3개 권역별 지역에서 순회 개최됐다. 보은군에도 목화밭이 많았다. 그 해 충북의 면화 공출(供出)은 1천2백만 근을 돌파했다.

공출은 ‘국민이 국가의 수요에 따라 농업 생산물이나 기물 따위를 의무적으로 정부에 내어놓는 것’을 말한다. 일제 강점기, 특히 전쟁 말기에는 농기구, 가마솥 등 쇠로 만들어진 대부분의 것은 강제공출 당했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 광복을 맞았다. 9월 11일 성조기를 앞세운 미군이 청주역에 도착했다. 시민과 학생들은 열렬한 환영행사를 했다. 점령군의 자격으로 인천에 상륙한 미국 하지 중장은 9월9일, 38도 이남지역에 대한 군정을 포고했다. 그리고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수립 때까지 3년간 남한지역에 군사 통치를 실시했다. 이 기간 미 군정청은 철저히 미국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

일본의 식민지 통치기구가 남한을 지배하는 데 적합하다고 보았다. 척결대상인 친일파 등 반민족적 인사들이 재 등용됐다. 온 나라는 좌우익으로 나뉘어 충돌했다. 혼란한 시기였다. 그 후 우여곡절 70년이 흘렀음에도 최근 박근령의 ‘친일망언’이 보여주듯 일제잔재의 흔적은 아직 곳곳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제 광복절의 의미를 제대로 되새겨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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