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 같은 손님들이지만 차라도 대접해야겠는데 마침 집 사람도 없고 하여 학생들에게 몇 학년이냐고 물으니 둘은 3학년이고 남학생 하나는 1학년이란다. 그러면 후배가 심부름을 하는 것이 당연 하겠지만 남의 집 주방이 낮 설 터이므로 선배라도 여자가 나을 듯 하니 주방을 뒤져서 커피와 과일을 내오라 하였더니 기꺼이 일어나 주방으로 간다. 하나는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고 하나는 과일을 깎더니 이내 가지고 와서는 자리에 앉으면서 편히 대해 주셔서 고맙다며 한국 문인 협회에서 매 달 보내주는 월간 문학지가 탁자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는 나보고 문인이냐고 묻기에 문인이라 할 것 까지는 없고 그냥 문인협회 회원이라 하였더니 국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 문인 선생님을 만나 게 되어 기쁘다고 하면서 고장의 전설이나 이야기가 있으면 들려 달라고 한다.
그래서 청벽산에 봉황(학으로 추정)이 서식 했다 하여 마을 명칭이 모래벌(불)에서 봉황리가 된 이야기를 시작으로 일본 명치 천황이 죽음으로 일제가 상복 입기를 강요하자 “원수의 옷을 입는 것은 만 대의 수치라. 차라리 목이 떨어져 죽을지언정 오랑캐의 옷은 입지 않겠다.”라는 글을 남기고 “하늘엔 해가 둘이 있을 수 없고 나라에는 두 임금이 있을 수 없다”며 청벽 산 소코바위에서 몸을 던져 자결함으로 순국한 이승칠 열사의 이야기, 그리고 삼박골 절터거리 전설로 언제인지는 몰라도 그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는데 어느 날 주지 스님이 고기가 너무 먹고 싶어서 밤에 마을에 내려가 몰래 닭을 잡아다 먹었다. 주지 스님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것을 흡족히 여기며 잠을 자는데 몸이 너무 가려워서 견딜 수가 없어 불을 켜 보니 이제 까지 없었던 빈대가 우글거리고 있는 것이다. 빈대는 주거 뿐 아니라 법당에 까지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승려들이 절을 떠나게 되었고 불자들도 발길을 끊게 되어 절은 폐사가 되고 말았는데 사람에게는 들키지 않았으나 부처님은 속일 수 없어 재앙을 불러온 것이다.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어 이를 절터거리라 하고 이때 거인 신장(神將)이 와서 불상을 메고 갔는데 그때 그 신장이 남긴 발자국이라 하여 절 터 아래 바위 길에 발자국 형상이 있는데 이를 장수 발자국이라 한다는 이야기 등을 해주었더니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서 고맙다며 함께 사진 찍기를 청한다. 나는 모델료가 비싸다고 농담을 하며 사양해도 막무가내로 청하여 주름진 얼굴을 내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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