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류알을 후비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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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알을 후비며
  • 이장열 (한국전통문화진흥원 이사장)
  • 승인 2015.02.05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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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렇게 신기한 작품을 만들었을까? 톡 터질 것 같이 영롱하게 부푼 루비를 촘촘히 깔아박고 그 위에 조심스럽게 박사보자기를 덮고, 또 그 위에 아름다운 보석 루비... 이렇게 깔고 덮기를 여러번, 둥글게 둥글게 뭉쳐 만든 그라나다(granada, 수류탄)! 던지면 곧바로 알알이 붉은 파편이 탁 터져 나올 것만 같다. 그라나다는 스페인어로 수류탄이라는 뜻인데 동시에 석류를 의미하기도 한다. 묘한 이름만큼 생김새도 신비하다. 단단히 묶어싼 겉가죽을 벗기고 석류알을 후빌 때만은 그 시끄럽던 아블라도르(서반아어로 말많고 시끄러운 사람을 뜻함)들도 조용해진다. 그리고 감탄한다. 석류를 후비며 나는 조물주의 창조의 신비를 훔쳐보는 것아 가슴 두근거린다. 그의 보물상자를 훔치는 것 같아 얼굴이 붉어진다. 그리고 입속에서 알알이 터지는 새큼한 향기, 눈을 게슴프레하고 느낀다. 이는 분명 고향의 향기다. 그 맛이다.

내가 스페인에 처음 도착한 때는 가을이 짙은 11월 어느 날이었다. 마드리드시내 중심가의 조용한 이면도로변은 하늘높이 솟아있는 프라타나스들이 한창 가을을 준비하고 있었다. 엄청나게 흩 뿌려놓은 낙엽들이 쌓여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푸라타나스의 향연, 바로 그것이었다. 내가 마드리드의 가을을 좋아하게 된 것도 그때의 추억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로변 푸라타나스들은 가지치기에 시달려서 볼품없이 변한 몰골이 참 불쌍한 마음까지 든다. 그런데 마드리드의 나무들은 그런 고통을 당하지 않고 자유를 만끽하면서 가맣게 높이 하늘로 기를 뻗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또 우리나라 같으면 가을맞이 낙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빗자루로 쓸어 시꺼먼 아스팔트를 들어내는 것이 거리청소부들의 일이다. 그러나 거기는 쌓인 낙엽이 하도 많아서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냥 두는지는 몰라도 나에게는 낙엽 쌓인 포도가 좋았다.

자동차도 뜸한 이면도로는 사람들마저 한산하다. 가끔 한 두대 자동차가 조심스럽게 지나갈 때면 나무잎들은 괜히 지나가는 자동차를 보고 쫒는 개들처럼 우루루 몰려 따라가다가는 힘에 부쳐 주저앉아버리곤 한다. 내가 혼자 묵고 있는 호텔은 바로 그런 곳에 있었다.

가족들은 서울에서 집과 자동차 처분, 그리고 중학생인 딸애의 학교문제 등 정리할 일이 많아서 우선 나 혼자 출국을 하여 마드리드 시내 중심가의 이면도로에 있는 소박한 호텔에 묵으면서 주거지 등을 알아보고 있던 중이었다. 그때는 핸드폰도 일반화되지 않아서 시차관계로 자정이 넘은 한밤중에 호텔을 빠져나와서 공중전화로 서울의 가족과 연락을 하곤 했었다.
그날도 여늬때처럼 우람한 프라타나스 도로를 가로질러 공중전화 박스에서 국제전화를 하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거리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이 조용했다. 그런데 갑자기 조용히 말을 걸어오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나무에 기대선채로 다시 한번 “끼에레스 아모르”(연애 좋아하니)? 한다. 나무둥치에 사람이 붙어서 있는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어디서 숨어 있다가 나타난 그녀를 보고 나는 약간 놀랐다. 야밤중에! 그러나 여자라 안심하였다. 포도에 가득 쌓인 밝은 프라타나스 잎들이 가로등에 반사되어 비치는데 유난히 빨간 그 여자의 입술이 프라타나스 색깔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언뜻 보기만 하고 아무 말도 안했다. 그녀는 나무에 기대선채 또다시 물었다. “노떼 구스타”(안좋아 해)? 이제는 대답을 안할 수가 없어서, 나는 “노”하고 대답했다. 그녀는 여전히 나무에 기대선채 다시 “노”(그래)? 하고 반문하듯 물었다. 더는 대답이 필요 없었다. 말없이 호텔로 돌아온 나는 또다시 남은 석류알을 후비고 있었다. 그리고 궁금했다.
누가 이런 기묘한 작품을 만들었을까? 보석이 터질까봐 비단보자기를 깔고 또 덮어 둥글게 둥글게 뭉친 그라나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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