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을 번영 발전시켜야 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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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을 번영 발전시켜야 할 이유
  • 최동철
  • 승인 2014.07.03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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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05년 전인 1909년 7월5일, 위기에 봉착한 나라를 구해내고자 목숨 건 의병 11명이 보은주둔 일본 헌병대와 전투를 벌였다. 보은군 내속리면 속리산 부근이었다. 그 중 5명이 전사했다. 다음날인 6일, 일본 내각회의는 한일병합을 의결했다.

일주일 뒤인 12일에는 이미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군대도 강제 해산당한 대한제국과 일본 간에 ‘기유각서’가 체결됐다. 사법권마저 빼앗아 간 것이다.
울분을 삭이지 못한 의병 3명은 20일 밤, 보은군 사각면 운현리(현 탄부면 매화리) 면장 집을 습격하여 공금 340원과 의류를 빼앗았다. 8월 24일에는 의병 7명이 보은군 탄부면장 집을 야습하여 면장을 총살하고 현금 80여원을 탈취했다.

1896년 8월 4일 조선의 지방제도를 23부에서 13개도로 개편하여 충청북도가 설치된 이래 기술된 보은지역관련 당시 역사를 보면 그렇다. 자료만을 통해 그 시점의 역사를 다시금 회고해보아도 치 떨리게 억울하고 원통해서 화가 난다.

당시의 보은지역 역사를 조금 더 흩어보자. 조선왕조 27명의 왕 중 가장 무능했던 두 명의 왕은 단연코 임진왜란 당시 선조와 대한제국 고종을 꼽을 수 있다. 고종은 일본에 의해 1907년 7월20일 퇴위를 당하고 8월1일 군대마저 강제 해산 당하자 그제서야 국가위기를 깨닫고 밀지를 내려 의병 봉기를 호소한다.

밀지를 받은 이강년은 충북 제천에서 봉기했다. 보은지역 유생 노병대도 8월5일 속리산에서 경성 시위대(대한제국 황제의 호위병)와 청주 진위대(대한제국 군대)의 해산병 37명을 규합해 의병을 일으켰다.

이어 22일에는 보은지역 유생 의병장 김운노가 서울에서 해산당해 내려온 군인 등 70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노병대 부대와 합세한 뒤, 보은군내 일본군을 공격했다. 이러하자 일본군경은 의병들의 활동 배경에는 이를 돕는 민중이 있다하여 9월11일 보은읍내 민가 261호를 방화 소각한다.

다음 달인 10월15일에도 산외면 장갑리 민가 17호를 방화 소각했다. 이런 와중에도 의병들은 보은인근 동서남북을 오르내리며 일본군경과 숱한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다. 그때마다 훨씬 많은 사상자가 생기는 쪽은 늘 의병들이었다. 1908년 6월 의병장 노병대가 결국 보은에서 일본군경에 의해 체포됐다.

그리고 1910년 8월29일 일본의 강압아래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된다. 그 후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 6.25전쟁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현재에 이르게 됐다.

희생과 처절한 삶을 살았던 선령들이 있어 오늘날 우리가 이 땅에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땅 보은을 번영 발전시키고 사랑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군수와 의원들의 4년 임기가 엊그제 시작됐다. 모두가 부단히 노력해 보은군이 발전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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