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남기게 된 '대추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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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남기게 된 '대추군수'
  • 최동철
  • 승인 2013.09.05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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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지도자보은군연합회 농업경영인보은군연합회 여성농업인보은군연합회 생활개선보은군연합회 보은군4-에이치본부 보은군4-에이치연합회 등 농민단체가 이향래 전 보은군수의 추모비를 건립키로 했다. 오는 24일 1주기에 맞춰 ‘보은대추를 명품화한 업적과 평생 농촌발전을 위해 헌신했던 뜻’을 기려 고인의 묘소 앞에 세운다는 것이다.

추모(追慕)는 살아생전 남이 기릴 만한 일을 길이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언가 업적이 있거나 어떤 개인이나 조직에 특별한 의미를 지녔던 이들을 위해 세우는 것이 추모비가 된다.

이를테면 중국의 당대 권력서열 2인자로 살다갔지만 인품이 훌륭했고 바른말만 하여 일인자보다 더 많은 존경을 받았던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사후에도 중국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그의 추모비에는 ‘인민의 총리로 인민이 사랑하고, 인민의 총리로 인민을 사랑하고, 총리와 인민이 동고동락하며 인민과 총리의 마음이 이어졌다’고 함축된 용어가 각인되어 있다.

헌데 아예 아무런 글자도 새겨있지 않은 추모비도 있다. 글자 없는 비석을 일러 백비(白碑), 무자비(無字碑), 또는 몰자비(沒字碑)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백비라 부르고 중국에서는 무자비 또는 몰자비라고 병칭하여 부른다. 중국에는 글자없는 비석이 많이 있다.

비석에 글자를 새기지 않은 이유는, 세상을 통치했던 제왕의 경우 그 절대적인 권위를 몇 마디 글자로 작은 빗돌에 다 새길 수가 없어서이다. 청백리나 충신의 경우도 많은 공적과 충성됨을 표현하기에는 비석이 턱없이 작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면, 업적을 크게 이루었으나, 덕을 더럽히고 패륜을 자행하여 세상 사람들의 지탄을 받은 경우에도 차마 글자를 새기지 못했다고 한다.

중국 역사에서, 여자로서는 첫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였던 측천무후 (則天武后)는 나라를 제멋대로 뒤흔들고 죽는 순간까지도 권력을 남용하며 휘둘렀다. 숱하게 사람을 죽였고 패륜도 서슴없이 저질렀다. 그녀의 묘지 앞에는 ‘무측천(武則天)의 무자비’라고 불리는 추모비가 서있다.

각설하고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虎死留皮 人死留名)’는 고사가 있다. 중국 양나라의 왕언장은 한갓 병졸에서 시작하여 장군이 된 인물이다. 용장이었으나 왕권을 둘러싼 골육상쟁으로 나라가 망하며 적군의 포로가 됐다. 당나라 왕은 그의 무용을 아껴 자기 부하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왕언장은 '아침에는 양나라를, 저녁에는 당나라를 섬긴다면 살아서 무슨 면목으로 세상 사람들을 대하겠느냐'며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다. 그의 나이 61세였다. 왕언장은 생전에 좌우명이었던 ‘범이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이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는 말처럼 구차히 살아남지 않고 명예로운 죽음을 택해 이름을 후세에 남겼다.

‘대추군수’도 추모비를 통해 이름을 남기게 됐다. 흠집은 있었지만 헛된 삶을 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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