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6월, 역사적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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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6월, 역사적 아이러니
  • 최동철
  • 승인 2013.06.27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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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0일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일본이 항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은 종식됐다. 닷새 뒤인 8월 15일 한국은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한반도는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이북지역은 소련군, 이남지역은 미군이 진주했다. 남북에 각각 미ㆍ소 군정에 의한 분단정부가 수립됐다. 광복 이후 자주독립 통일국가를 향한 염원은 외세에 의해 좌절됐다. 결국 남한에 대한민국정부,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분단은 고착화 상태에 돌입했다.

이에 앞서 1945년 4월 12일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로 부통령 해리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트루먼은 다른 대통령들처럼 좋은 대학이나 명문가 출신은 아니었다. 고등학교를 나와 철도건설 하청회사와 지방은행 두 군데에서 말단 일을 하다가 집안의 농사일도 10여년 도왔다. 그러다 미주리주 방위군에 복무하게 되면서 연방군 포병부대로 옮겼고 1차대전때 프랑스로 파병되었다가 대위로 제대한 자수성가형 정치가였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트루먼대통령은 미국의 군대를 총괄 지휘할 국방성을 신설했다. 중앙정보국(CIA)과 공군도 창설하는 등 미국 안보와 국방의 기틀을 다졌다. 1948년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한 트르먼은 이듬해인 1949년 10월 24일, 유엔 총회를 열고 뉴욕에 유엔본부건물 기공식을 갖기도 했다.

같은 해 유엔이 발족하기 직전 10월 1일에는 모택동의 공산군이 수도 북경을 점령하여 중국은 공산국이 됐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50년 6월25일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전쟁을 일으켰다. 트루먼대통령은 맥아더를 총사령관으로 참전을 즉각 결정했다. 사실 한국전쟁에서 북한과 중국공산군을 효과적으로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트루먼의 특별한 반공사상 덕분이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을 맺을 때의 미국 대통령은 같은 해 1월 취임한 아이젠하워였다. 당시는 세계가 냉전시대로 돌입하던 시기여서 반공정책은 미 국민들의 관심을 끌었다. 아이젠하워는 선거전에서 ‘공산주의를 저지하기위해 전쟁 중인 한국에 갈 것’이라고 공약했고 유권자들의 큰 지지를 받았다. 그는 실제 1952년 12월 대통령당선자 신분으로 한국전에 참전 중인 미군들을 직접 방문해 갈채를 받기도 했다.

중국군은 선발대가 전쟁발발 당해 연도인 1950년 10월16일, 본대가 10월19일 한국을 침략했다. 명목은 침략군이 아닌 북한원조 지원군이었다. 5개 야전군 예하 5개 병단으로 연 병력이 2백43만8천명 규모였다. 그리고 97만 여명이 부상당했거나 실종, 사망했다. 때문에 북한군과는 혈맹관계이지만 우리에게 있어 중국은 적국이었다. 하지만 시대는 변하는 법. 냉전이데올로기는 이제 한반도를 제외하고는 흔적조차 희미해 졌다.

6.25전쟁 발발 63주년째 되는 올해 박근혜 대통령이 27일부터 3박4일간 일정으로 중국 국빈방문을 한다. ‘양국 공조를 더욱 내실화하고, 북한의 비핵화 목표 달성을 위해 한중간의 협력과 공조를 다져 북한이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진정성있는 대화의 장으로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방중목적을 밝혔다. 역사적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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