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의 역사는 보은의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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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의 역사는 보은의 미래다
  • 박진수 기자
  • 승인 2013.05.23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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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에는 삼년산성이 있다. 서기 470년 신라는 보은 땅에 삼년성을 축조하면서 북방진출의 원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고 결국 676년 삼국을 통일하는 대업을 이뤘다.
그로부터 1200년후 1893년 3월 또 다시 보은 땅에는 8도의 백성이 최소한 2만에서 7만여명이 장안마을에 모였다. 새로운 세상, 사람이 하늘인 세상을 갈구한 온 나라의 백성이 한마음 한뜻으로 이 곳 보은 땅에 모였다. 그해 9월 백범 김구선생 역시 이 보은 땅을 찾아와 해월 최시형 선생으로부터 접주의 자격을 부여받고 고향 땅 해주로 돌아가 1894년 해주성 전투의 선봉에 서서 보국안민을 위한 애국심을 키웠다.
삼년산성 축조를 시작한 470년에서 1894년까지 보은의 역사는 한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정학적인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보은 땅은 백두대간의 허리 속리산 아래 수많은 역사와 문화재를 남겼다. 전국 어느 시,군에도 뒤지지 않는 역사와 문화재를 보유하고도 이 땅에 살고 있는 지역민들은 무관심 내지는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 여겨져 있다.
1900년 당대 최고의 목수와 1만석을 들여 건축된 선병국 가옥은 중요민속자료 국가 지정문화재로 지정 되었어도 사유재산이라는 명목으로 방치 아닌 문화재 관리의 허상을 보여주는 듯해 안타까울 따름이다. 도리어 문화재 지정이 무색할 정도로 보은을 찾는 외지인들에게 부끄러운 보은을 보여주고 있다.
또 근현대사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대변하고 있는 보은동학농민혁명공원은 100억여원을 투입해 공원을 조성한 이후 한번도 시설정비 없이 속리산 가는 길에 잠시 쉬어가는 공원으로 본래의 역사공원으로써의 실체는 사라지고 전시관 하나 없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공원으로 전락해 있다.
보은의 역사가 없어서 일까? 아니면 보은의 역사가 가치가 없어서 일까? 무엇이 잘못되어 보은의 역사가 평가절하되어 관리되지 않은채 귀찮은 역사로 전락하고 있는지 돌이켜 볼 때이다.
1930년대 한국문단의 천재로 불리던 오장환 시인의 선양사업이 1996년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오장환 시인에 대해 그가 태어난 회인에서 조차 이름 석자 기억하는 주민은 적었지만 보은의 대표적인 문화인물로 그의 명성은 문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고 이제 오장환 시인의 고향인 회인면 중앙리에는 생가와 문학관이 자리하고 있다.
16년전 오장환 시인을 이 땅의 문화인물로 선양을 시작하듯 2013년 또 다시 이 땅의 역사인물 충암 김정 선생에 대한 선양사업이 시작된다. 보은읍 성족리가 고향인 충암 김정선생은 35세 짧은 생을 살았지만 600여편의 주옥같은 시와 개혁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의로운 정신은 보은정신의 표상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의 역사 없이는 미래를 이야기 할 수 없다. 보은을 지탱하는 굳건한 힘은 보은의 역사이며 이 역사속에서 보은의 미래를 꿈꿀 수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열망이 삼년산성의 축조하면서 시작되었다면 이 땅의 미래는 과거의 역사의식을 토대 위해 축조될 수 있을 것이다.
/박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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