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년 전 보은, 현재의 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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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년 전 보은, 현재의 보은'
  • 최동철
  • 승인 2013.01.10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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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와 같은 ‘먹구렁이의 해’ 계사년이었던 120년 전인 1893년, 보은은 세상사의 중심이었다. 당시 통치자로 무능했던 고종과 막후신료는 물론 주변 강국이었던 청나라와 일본의 세작(細作)들까지 귀와 눈을 집중시켜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2만 여명의 동학교도들이 보은군 장내리에서 대규모 집회를 가졌다. 조선 방방곳곳 깨인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힘이 없어 외세에 농락당하던 한심한 조정(朝廷)과 특히 호심탐탐 침략을 엿보던 일본에 일갈하기 위해서였다. 척왜 척양(斥倭斥洋)과 창의(倡義:국난을 당하였을 때 나라를 위하여 의병을 일으킴)를 기치로 내걸었다.

이 때 만17세의 혈기왕성한 백범 김구선생도 황해도 해주에서 보은 장내리에 왔다, 백범은 전봉준과 같은 ‘접주(接主)’의 지위를 갖고 있었다. 백범일지에 다음의 내용이 있다.
‘그해 계사년(1893) 가을에 오응선, 최유현 등은 충청도 보은에 계신 해월(최시형) 대도주로부터 각자 자기 연비(동학교도)들의 명단을 보고하라는 경통(공식서신)를 받았다. 보은에 갈 명망 높은 동학교도 15명을 선발할 때 나도 거기에 뽑혔다. 길게 땋은 머리가 불편하여 갓을 쓰고 연비들이 추렴해 준 노잣돈으로 대도주님께 올릴 토산품으로 특별히 해주 향먹을 준비해 가지고 길을 떠났다. 육로와 수로를 이용해 보은군 장안(보은군 장내리)이라는 동네에 들어섰다.’

그 해 1893년 보은 장내리 모임은 동학농민봉기의 효시가 됐다. 전국 65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본격적 동학농민운동은 이듬해인 1894년 있었다. 그리고 높이 날고 멀리 뛰고자했던 그들 대부분은 아침이슬처럼 스러져갔다.

오늘날 보은. 지난해 11월부터 발전소 유치를 반대하는 주민들이 군청 진입로 옆에 텐트를 치고 농성중이다. 혹독한 추위가 연일 기승을 부리는데도 남녀노소 모두 나서 고생을 감수하고 있다. 올 농사일을 대비해 충분히 휴식을 취해야할 농한기임에도 쉬지 못하고 있다.

발전소 유치와 관련해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번 달 말쯤이나 의향서 제출 기업에 대한 평가결과가 발표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부터는 공정성을 높이기 위해 민관으로 구성된 평가단의 평가지표를 공개하기로 했다. 평가 기준은 사업계획서 75점, 주민 의견 15점, 시군 의회 의견 10점 등으로 이뤄진다. 이중 지역희망정도(주민+의회=25)가 가장 중요한 선정기준이 된다.

실례로 남해 화력(4000㎿), 고성 화력(4000㎿) 등은 주민투표까지 치러지는 진통 끝에 유치반대로 결론이 났다. 제출된 동의서에서도 장애요인이 생겼다. 지역주민들의 동의서류를 실제 확인한 결과 5~15%정도의 오차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지역주민 동의서는 발전소 반경 5㎞ 이내 세대주 2000명 정도를 대상으로 하는데 그 외지역의 주민들이 참여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평가일정은 재조사가 끝난 후에라야 잡힐 전망이다.

각설하고, 120년 전에는 국가의 존망과 미래를 놓고 농민들이 들고 일어난 민중봉기의 날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보은군의 발전적 미래 동력이 될 청사진이 될 것이냐, 아니냐를 놓고 유불리를 따지고 있다. 그리고 역사는 도도히 흘러 세월이 흐른 후 검증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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