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扶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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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扶助)’
  • 최동철
  • 승인 2012.11.08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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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뒤에 붙는 ‘금(金)’자는 없었다. 돌잔치, 결혼식, 회갑연, 초상집이든 간에 모두가 ‘부조’였다. 부조란 말 그대로 길사나 흉사 등 큰 행사가 있을 때 친척이나 이웃이 십시일반 거들거나 도와주는 것을 뜻했다. 어찌 보면 품앗이 형태로 돈이나 음식, 노동력 등을 보태, 일을 잘 치러내는 우리의 오랜 전통이자 미풍양속이었다.

천수답에만 의존했던 예전 우리네 농촌은 대부분 가난에 찌들었다. 흉작에 약간 수확된 식량은 겨울나기를 하고나면 거덜 났다. 봄에는 초근목피로 연명해야만 했다. 개천(開天)이래 수천 년 간 거의 매년 겪어야 했던 한반도인의 삶이었다.

그래서 집안의 경사인 혼인이나 애사인 초상이 나면 보통 걱정이 아니었다. 애경사에 참석하는 조문객이나 하객에게 접대할 음식장만부터 이를 준비할 일손까지 풀어야할 문제가 컸다. 이럴 때 가까운 친척과 동네 사람들이 나섰다. 집에서 만든 식혜, 막걸리 또는 각종 먹을거리 등을 내놓거나 일손으로 충당하며 부조했다.

그러던 부조가 언제부터인가 얼굴 바짝 쳐든 도도한 형태의 ‘부조금’이 됐다. 세분되어 조의금(弔意金)과 축의금(祝儀金)으로도 불린다. 아마도 산업화 시대가 시작되면서 만연해진 배금주의로 인해 변질된 것으로 풀이된다.

진심어린 축하, 진정 애도하는 마음의 부조는 의미가 없어졌다. 봉투 속 부조금 액수의 많고 적음이 인격의 척도가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조문, 하객의 숫자가 자기과시의 한 방편이 되고 부조금 액수는 자기만족의 수단으로 전락했다.

그러다 보니 평소 왕래조차 없던 방계혈족은 물론이고 이해관계가 있는 거래처, 심지어 명함만 교환했을 뿐인 단순한 인사들에게 까지 마구잡이 청첩과 부고를 해댄다.
흰 봉투 속 '부조금'은 편의주의에서 비롯된 ‘부조’의 변형이랄 수 있다. 당연히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자는 마음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이제는 ‘부조’의 본뜻은 퇴색되고 돈 봉투 문화로 전락했다. ‘월급도둑’ ‘준조세’라는 별칭까지 생겼다. 얼굴도장 찍듯 돈 봉투를 내밀 뿐이다. 밥값이라도 건지려고 부랴부랴 밥만 먹고 나온다. 마음껏 축하 할 일도 애도할 일도 없다. 오늘날의 부조는 우리 민족의 상부상조, 아름다운 풍습이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울 정도가 됐다.

오늘날이 오기 전 조선시대 때만 해도 우리의 ‘부조’를 부러워했던 외국인이 있었다. 청나라 말기 사상가인 캉유웨이(康有爲)는 ‘조선인만이 갖고 있는 뜨거운 마음의 표시’라고 치켜세웠다. 우리 민족 특유의 오가는 정과, 받은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려 애쓰는 정서가 바로 부조 문화라는 것이다.

주위에 한 분이 자신은 품앗이를 주고받을 처지가 아닌데도 막무가내 ‘부조금’에 시달리고 있다며 ‘오늘도 할 수 없이 비싼 점심을 먹었다’고 하소연했다. 이에 몇 분도 동감을 표시했다. 동서고금 유례를 찾기 힘든 ‘부조금’문화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겨울의 길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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