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노인을 공경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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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노인을 공경하라
  • 최동철
  • 승인 2011.11.24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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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분야에 종사하는 40대 초반의 한 남자가 “노동력 없는 노인들은 빨리 사라져야 한다”고 핏대를 세우며 언성을 높였다. 그들 숫자가 늘어나 복지비가 많이 들어 국가재정이 바닥나고 젊은 세대가 짊어져야할 부담액이 가중됐다고 했다. 특히 재정자립도가 그중 열악한 보은군의 경우 노령화 비중은 상대적으로 높아 지역발전을 더디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주장도 침 튀기며 펼쳤다.

열변을 들으면서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이 왔다. 효(孝)를 강조하는 일부 설화에서 전해질 뿐 역사적 사실은 아닌 것으로 밝혀진 바 있는 ‘고려장’이 연상됐다. 늙고 병든 부모를 산속의 구덩이에 버려두었다가 죽은 뒤 장례를 지냈다는 풍습이 고려장 아니던가. 그래서 오늘날에도 늙고 쇠약한 부모를 낯선 곳에 유기하는 행위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여하튼 그 남자의 경우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70대의 한 지인, 모씨가 수술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 연중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달리기와 수영 등 운동을 해와 체력만큼은 자신했던 그다. 그런데 갑자기 ‘방광암’으로 판정을 받았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주변 누구에게 신앙을 권유한 적은 없지만 그 누구보다 ‘목사’를 존경했고 또 주위사람들이 알세라 ‘돕는 일’ ‘궂은 일’은 혼자 도맡다시피 해냈다. 아무도 알아준 적 없지만 보은국민체육센터 내 어지럽혀진 신발정리는 늘 그의 몫이었다.

그런 그가 입원하기 전날 심란해서인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두서없이 털어놨다. 그는 보은에서 소위 머슴이 있던 부잣집에서 출생했다. 그리고 일제치하 시대를 거쳐 동족상잔인 6.25전쟁은 물론 갖은 정치적 격변기를 겪었다. 그의 부친은 별 생각 없이 도장을 찍어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적이 있고 그 후 본의 아닌 ‘빨갱이’로 불리기도 했다. 그 후 울화병 탓인지 모씨가 18살 때 부친은 세상을 떠났고 그 역시 고향을 떠나 서울시공무원이 됐다. 연좌제는 80년대 초반, 공식적으로 폐지됐지만 그는 승진은커녕 한직에서 맴돌아야만 했다.

그래도 열심히 생활해 1남 2녀를 가르쳤다. 미국에 유학시키는 것만이 최선인줄 알고 모든 것을 바치다시피 했다. 결과, 아들은 뉴욕, 두 명의 딸은 로스앤젤레스에서 각각 가정을 꾸려 살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을 감수하며 어렵게 아이들을 양육해 결국 훌륭한 미국시민을 육성한 셈이 돼버렸다. 한 때는 미국에 가서 자식들과 함께 살고자 했다. 그러나 김치냄새 풍기면서 마음 편히 살 수 없는 곳이 그 곳이었다. 부딪히는 모든 것이 불편했다. 그래서 여생을 고향 보은군에서 외롭지만 건강하고 행복하게 마무리 짓고 싶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병마가 찾아온 것이다. 자식들은 만리타국에 있다. 그의 뇌리에는 이제 회한만이 남았다.

우리 주변 노인들 대부분은 이 같이 자신을 희생하며 국가와 민족 그리고 가족을 위해 살았던 비운의 주인공들이다. 지금도 툭하면 정치판에서 튀어나와 럭비공처럼 제멋대로 휘젓고 다니는 그 이데올로기의 폐해를 겪은 세대다. 국가발전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가정보다는 직장업무를 우선시했던 세대다. ‘용병’소리 들으며 해외 출병하여 목숨을 대가로 국가발전의 원동력을 취했고, 뜨거운 열사의 나라에 가서는 힘든 건설노동으로 ‘달러벌이’를 한 세대다. 그런 시대를 거쳤기에 비로소 우리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무조건 노인을 공경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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