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된 공공 의식,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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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된 공공 의식, 부끄럽다
  • 최동철
  • 승인 2011.11.17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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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어느 장날. 농촌 무지렁이 총각이 장을 본 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에 탔다. 한 손에는 보따리와 함께 조기 두름을 들었고 또 한 손에는 종계로 쓸 냥 수탉 한 마리를 들었다. 버스에는 빈 좌석은커녕 서 있기도 마땅치 않을 만큼 사람들이 많았다. 두리번거리던 그는 한곳 비어있는 좌석을 발견하고 ‘웬 횡재냐’며 얼른 비집고 들어가 앉았다. 잠시 후 화장실을 다녀 온 운전기사가 생뚱맞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그 총각은 들은 척도 안했다. 자기가 먼저 차지했으니 그 자리는 제거라며 일어나길 거부했다. 버스가 출발하려면 운전기사가 앉아야 한다고 아무리 설득을 해도 막무가내였다. 화가 난 승객들이 주먹질과 멱살을 잡고 끌어내려 해도 죽을힘을 다해 버텼다. 목숨을 걸다시피 자리를 지키는 그에게 있어 그 자리는 ‘나와 가족의 이익을 위한 절대선’이기 때문이었다. ‘무지와 무뢰’가 세상을 지배했던 시대의 중국이야기다. 그 때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공공 의식은 뒷전으로 밀려나는 시대이기도 했다.

이를 탄식한 인물이 있었다. 중국 현대문학과 현대사상의 거장이라고 존칭되는 루쉰(魯迅)이다. 그는 한(漢)족에 의한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 조정 타도의 혁명운동이었던 신해혁명 전후 ‘아큐정전’ ‘광인일기’ 등 중국 최초 구어체의 소설을 썼다. 그는 소설을 통해 ‘어두운 역사 속에서 노예화에 길들여진 중국민중의 의식을 질타했다’. 모욕을 받아도 저항할 줄 모르고 주인의식이 없는 만큼 공공 의식도 없는 민중을 일거에 잠에서 깨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로 그는 당시 중국 사회 병의 근원을 부끄러움도 무릅쓰고 적나라하게 제시했다. ‘아큐정전’은 오늘날에도 세계적인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사실 굳이 다른 나라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다. 예로든 중국의 그 시대를 수십 년이나 훨씬 지나 ‘국격이 어떠니’ ‘곧 4만 달러 선진국 진입이니’하고 팔불출처럼 자찬에 빠진 우리나라를 보더라도 낯 뜨겁고 부끄러운 일들이 부지기수로 일어나고 있다. ‘지하철 폭언녀’라며 노인에게 막말을 했다는 경우도 있고, 경로석, 장애인석을 차지하고 스마트 폰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젊은이들이 아직은 많다. 공중시설을 제 것인 냥 함부로 사용하고 순서를 기다리는 다른 사람에게는 배려할 줄 모르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다른 지역을 예로 들 필요도 없다. 보은지역에도 공공의식이 실종된 경우는 조금 관심만 가진다면 허다하게 목격된다. 보은국민체육센터 샤워장 내 사우나실 문이 자기가 나갈 때, 제대로 닫지 않아 열린 채 있어도 자신은 끝났다며 ‘나 몰라라’ 가버리는 형편없는 ‘X’이 아직 있다. ‘물을 아껴 쓰자’는 구호가 벽에 있어도 헤프게 쓰며 낭비하는 ‘X’도 아직은 있다. 수영장에 ‘보호자가 함께해도 130cm미만 어린이는 성인 풀에 입장할 수 없다’고 안내판이 있음에도 자신들과는 상관없다며 무지몽매 티를 내는 부류가 아직 많다.

통행인들이 보행해야 할 도로 옆 인도를 제 땅처럼 점유한 채 ‘먹고 사는 일’임을 내세워 간섭하지 말라는 식으로 오히려 으름장을 놓는 경우도 실존한다. ‘공공의 적’이라는 말이 있다. 영화처럼 공공의 적은 부패한 권력자들만을 뜻하지 않는다. 공공질서를 어지럽히거나 무시하는 상습행위자도 엄연히 공공의 적이다. 공중시설을 훼손하거나 공공장소에서 다른 이용자에게 불편을 주는 것 등등 이는 모두가 부끄러워해야 할 우리의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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