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환은 1930년대 시의 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시를 가장 잘 썼던 보은 출신 서정 시인이었다. 그러던 그가 해방을 맞으며 발표한 시 ‘병든 서울’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즉 무산계급혁명을 지향하는 시인임을 표명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에 대한 일제 검거령이 내려진 1947년 그는 임하 시인과 함께 월북하고 만다. 그의 작품은 오랫동안 금기시됐다.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 해금(解禁)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빗장이 풀렸다. 그해 충북문인협회는 얼른 시인의 생가에 표지석을 설치하고 싶었다. 그러나 주민들의 이른바 ‘빨갱이 시인’에 대한 거부감과 이후 발생할 지도 모를 재앙(?) 등을 내세워 한사코 반대하는 통에 면사무소에 방치되는 수난을 겪었다. 10년의 세월이 더 흐른 1998년에 가서도 기껏 생가 입구 노인정마당에 세워지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일제 강점기, 그가 20세 때인 1937년 펴낸 첫 시집 ‘성벽’ 에 실린 시는 묵은 관습에 대한 반항과 거부가 주종을 이룬다. 유교적 전통과 피폐해지고 난잡했던 당시 시대상의 허례허식을 타파하고 싶은 강한 거부의식을 표현하고 있다.
‘내 성은 오씨
어째서 오가인지 나는 모른다.
가급적으로 알리어주는 것은
해주로 이사 온
청인(淸人)이 조상이라는
가계보의 검은 먹글씨
옛날은 대국숭배를 유심히는 하고 싶어서
우리 할아버지는
진실 이가였는지 상놈이었는지 알수 없다.
똑똑한 사람들은 항상 가계보를 창작하였고 매매하였다.
나는 역사를 내 성을 믿지 않아도 좋다.
해변가으로 밀려온 소라
나도 껍데기가 무척은 무거웁고나. 수통하고나
이기적인 너무나 이기적인 애욕을 잊을랴면은
나는 성시보가 필요치 않다.
성시보와 같은 관습이 필요치 않다.‘
‘오래인 관습 그것은 전통을 말 합니다’라고 부제가 붙은 그의 시 ‘성씨보’다.
우리나라는 조선말기 공명첩 등 매관매직과 일제 강점기 신분제도 붕괴로 족보매매가 유행했다. 호구조사를 하면서 성씨가 없는 사람에게는 조사하던 관원들이 뒷돈 액수에 따라 흔한 성씨나 명문성씨 중 임의로 부여했을 정도다. 시인은 이런 허구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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