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새 학기가 돌아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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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새 학기가 돌아오면...
  • 송원자 편집위원
  • 승인 2010.03.04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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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려다 본 달력이 3월이다. 아직은 살짝 춥지만, 집안을 돌아보면 겨울에는 보이지 않았던 먼지가 눈에 들어오고, 화단에 예쁜 꽃들이 피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 더욱 사랑스러운 것을 보면 이미 마음은 봄인 것 같다. 그래서일까? 성급하게 봄을 집안에 많이 들이려고 창문을 활짝 열어 놓아 본다.
봄을 품고 다가온 3월에는 입학과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 된다.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면, 집에서 마냥 자유롭게 지내던 아이가 병아리 같은 귀여운 노란 원복을 입고 유치원에 들어가는 날, 아이가 어느 틈엔가 훌쩍 자라 있음을 보면서 가슴이 벅차 눈물이 쏟아지는 감동을 맛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 감정도 잠시, 작은 또래 집단에서의 생활이 호기심과 재미보다는 아이들이 가족과 분리가 잘 되지 않아 처음 몇날 며칠을 울고 가지 않으려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부모와의 처음 분리가 유치원을 다니지 않았던 나의 세대에는, 초등학교 입학 때라 며칠을 어머니들이 학교를 동행하며 학교생활을 돕기도 했고, 그 후 언니나 오빠 그리고 이웃의 친구들과 차츰 학교를 오가며 적응을 하게 된 것 같다. 그리고 성년이 된 내 아이 세대에는 유치원이, 요즘에는 아주 어린 유아기 때부터 분리가 되어 유치원 다닐 무렵에는 적응을 잘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게 요즘 아이들은 나와 내 아이들이 겪은 과정보다 훨씬 더 먼저 가족과 분리가 되고, 집단생활 역시 일찍 시작을 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초등학교 입학식은 유치원의 입원식보다 설렘은 적은 대신 공부와 직결이 되기 때문에 좀은 무거운 마음이었고, 이 후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의 과정을 겪으며 감동과 설렘은 더 옅어지면서 걱정은 더 쌓여 갔고, 둘째 아이는 더 더욱 덤덤해졌던 것 같다.
내게 학창시절중 가장 어려웠던 시기는 어렵게 시험을 치루고 들어간 중학생이 되던 때인 것 같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700여명이 함께 다녔지만 누구는 누구의 언니나 오빠, 그리고 동생, 이렇게 형제, 자매, 남매 등 가족관계를 알 수 있었고, 친구들도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나 훤히 알고 있었던 때와는 달리, 중학교는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귀에서 몇 센티 미만의 단발머리를 해야 하고 운동화는 검정이나 감색, 활동하기 불편한 교복, 그리고 명찰과 학년 뺏지를 꼭 달아야 하는 많은 규율이 긴장감을 가져다주었다.
군 관내 각 초등학교에서 모인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시골 초등학교 출신으로 동문인 친구는 불과 8명인데 비해 읍내 삼산과 동광을 졸업한 친구들이 반 이상을 차지하여 열등감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친구들이 하나같이 상처를 받았던 자질이 형편없고 아주 못된 담임선생님과의 만남, 과목별로 다른 선생님들 파악에 정말 학교에 가기 싫을 정도로 성장통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두꺼워진 책을 넣어 한 쪽 어깨가 기울 정도였던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한 시간 정도를 걸어야 했던 등굣길은 보은 읍내를 거쳐서 가면 멀어서 지름길인 들길(동안이들)을 지나 보청천의 돌다리를 건너서 둑길을 넘어 다시 논둑길(장께미들)을 걸어서 가야 했다. 그 길을 이용하는 학생들은 내가 다닌 종곡학교 학군과 속리초등학교 일부 학군, 동광 학군 일부로 여중, 여고생, 그리고 농고생(지금의 자영고)이었다.
그 길은 초등학교를 다니던 길보다 멀었던 것도 힘들었지만 문제는 보청천을 건너야 하는 돌다리였다. 지금은 3월에 영하로 내려가는 날들이 많지 않지만 그 때는 거의 영하권으로 그 돌다리의 돌이 얼어서 걷다가 미끄러져 물에 빠져 운동화와 발을 적시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짓궂은 농고생이 아침 일찍 돌다리를 건너면서 운동화 바닥을 물에 적셔 돌에 묻혀 시간이 지나면 얼게 했다. 그리고는 그 돌다리를 건넌 다음 둑길 위에 앉아서 뒤 늦게 오는 여학생들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그 길을 위태롭게 걷는 여학생들을 보다가 물에 빠지기라도 하면 와!와! 소리를 지르며 웃곤 했다. 아니 빠지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어느 때는 그 얼은 돌을 보며 돌다리 걷기를 포기하고 아예 운동화와 양말을 벗고 바지를 접어 올리고 차가운 냇물을 건너 종아리와 발이 빨갛게 얼기도 했었다.
그 길을 함께 이용했던 친구에게 얼마 전에 들은 이야기로, 그렇게 얄밉고 원망스러웠던 농고생이 있는 반면, 그 돌다리에서 머뭇거리는 몇몇 친구들을 보고 하나씩 업어서 물을 건너 주었던 고마운 농고생이 있었다고 한다. 친구 표현에 의하면 그 학생은 눈이 선하게 생겼고, 키가 컸는데, 긴다리 산다고 했단다. 긴다리는 장안면 구인으로 알고 있는데 그 친구 기억으로 농고의 학생회장이었다고 한다. 아마 그 분은 중학교에 갓 입학하여 미끄러운 돌다리를 건너야 하는 여학생들을 보며 착한 마음으로 등을 내밀었고, 순수했던 친구들은 거리낌 없이 업혔던 것 같다. 지금 같으면 어떨까? 그 순수한 호의를 갖기도 또 받아드리기도 어려웠을 듯싶다.
친구는 내게 이 이야기를 꼭 한 번 써서 그 분을 찾고 싶다고 했다. 그 분을 만나서 그 때 고마웠던 추억을 이야기하며 따뜻한 밥을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난 전혀 그런 기억이 없는데 그 분은 누구일까? 나 역시 궁금하다. 혹이나 이 글을 그 분이 읽는다면 연락을 했으면 좋겠다. 친구 말로는 좋은 일을 했기 때문에 아마 잘 살고 있을 것이라 했다.
나를 성장하게 했던 기억의 깊은 창고 속에 있는 보청천의 돌다리, 지금은 사라졌지만 새로운 입학과 새 학년 새 학기를 맞이할 무렵이면 떠오른다. 작았던 내 모습들이...
/송원자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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