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있어 생과 죽음은 필연적 인과 관계이기에 노인에게 있어 죽음이라는 문제는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없는 당면 문제이다. 사람이 태어나 자기의 수를 다 하고 죽는다면 이는 자연의 이치를 잘 따른 것이라 할 것이다. 예로부터 인생 칠십 고래희(古來稀)라 하였고 성서에도 우리의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세월이 날아가는 것처럼 빠르다고 하였다.
예로부터 죽음을 잘 맞이할 수 있는 복(考終命)을 오복 중에 하나라 하여 모든 사람이 이를 소망 하고 있다. 그러나 인생의 삶이 내 뜻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듯 죽음 또한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려움과 공포 가운데 죽음을 맞게 되는 것 같다. 언제인가 존엄사의 권리 주장으로 안락사의 찬반 여론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지만 죽음은 물이 흐르는 순리처럼 따라야 할 것 같다. 그러므로 노인들은 언제나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어느 분의 말대로 죽음이 닥쳤을 때에도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인생이었을까? 생각 만 해도 즐거운 일이다.
종교에서 죽음은 영과 육을 분리시키는 것일 뿐 영의 영원한 삶의 시작이라고 하는데 기독교에서의 천국이나 불교에서의 극락세계와 지옥이나 연옥이 곧 이것의 가르침이다.
이제 까지 이 땅에 수많은 사람이 태어나고 또 죽어 갔듯이 우리도 그 흐름 속에 또 함께 갈 수 밖에 없기에 그 어느 시간을 준비하는 것은 노인의 피할 수 없는 과제이며 그 준비함에 게을리 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두려움 없이, 홀가분하게 나의 죽음과 더불어 떠날 수 있기를 소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내 흔적을 남기려고 애쓰지 말았으면 한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라는 옛말이 있지만 그 이름을 기억하는 세월이나 세대가 얼마나 될까?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으며 뒤에의 세대가 전에의 세대를 기억함이 없다“고 한 솔로몬의 고백처럼 흔적을 남기려는 욕심이 오히려 욕이 되지는 않을까? 생각 해 본다. 묘지를 아름답게 꾸미고 묘비를 아무리 크게 세운들 기억 해주는 마음들이 없다면 얼마나 욕된 죽음인 가를 헤아려 보는 지혜도 가져 보아야 할 것이다. 며칠 전 친구 몇 분과 함께 속리산 등산길을 따라 입석대로 올라 문장대로 내려오며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고 바위에 이름을 새겨 놓은 것을 많이 보았는데 그것을 보면서 왜 욕된 흔적을 남겼을까? 안타까워 한 적이 있다. 나는 지난 2. 16일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을 잊을 수 없다. 누구나 다 그 분처럼 살 수는 없지만 생명만을 연장하기 위한 기계적 치료를 거부하고 무소유의 삶을 살다가 마지막 하나 줄 수 있는 자신의 각막을 기증하고 “ 고맙다, 서로 사랑 하라”는 부탁을 남기고 선종한 그의 죽음은 우리 모두가 배우고 흠모해야 할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내가 가진 것의 처리 문제이다. 내가 가진 재산이 있으면 자녀에게 상속을 하든 사회에 기증을 하든 법적 효력이 있는 유언장을 작성 해 두어서 내가 죽은 후 유산으로 인한 다툼이 없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유산으로 인한 다툼은 당사자들은 물론 고인을 욕 되게 할뿐이다.
삶은 귀한 것이다. 그러기에 아름다워야 한다. 어렵고 험난한 세월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온 우리의 삶이 끝나는 순간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라고 한 시인의 노래처럼 나의 죽음도 아름답기를 간절히 소망 해 본다. /김정범 실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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