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눈에 다 채워지지 않는 넓은 들녘을 따라 보기 좋게 들어앉은 집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쌀쌀해진 겨울 분위기를 반영하듯 집집마다 흘러나오는 뽀얀 연기가 마을을 휘감아 올라가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깨끗한 마을의 분위기는 옛 고향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어 마을로 들어서는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오전 10시도 채 안된 시간이었지만 마을회관에는 벌써부터 몇몇 어르신들이 자리를 펴고 앉았다.
어르신들의 얘기를 듣기 위해 회관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나온 세월을 구수하게 풀어내는 어르신들의 얘기소리에 그냥 주저앉고 말았다.

#뱀도 타 죽는다는 마을
“오래 살았다고 벌금 내라고 그러는 거야? 왜 이리 사진을 찍어 대. 남부끄러워 죽겠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올해 77살의 이정옥 할머니. 18살에 시집을 왔으니 상장1리에서만 60년째 살고 있다. 강산이 여섯 번 변하는 세월을 상장1리에서 살아 온 것이다.
“보은읍 수정리에서 가마를 타고 이곳으로 시집을 왔어. 동다리를 건너서 보은읍 월송리 용천이 마을을 지났고, 월고지를 지나 새골재도 가마를 타고 넘었지. 시집을 가서도 보리쌀을 이고 고개를 넘어 보은장에 나왔어. 관터장(관기장)이 생기면서 그 고생을 접었지.”
모처럼 만에 손님이 와서 그런지, 쩌렁쩌렁한 이정옥 할머니의 얘기는 계속 이어졌다.
“이곳 상장리는 뱀도 타 죽는다는 곳이야. 물도 부족하지만 땅도 투박해서 달밤에도 가뭄이 든다는 지역이 바로 이곳이야. 비료도 없던 시절, 강아지 풀 꺾고, 가랑잎 모아다 비료를 대신해 농사를 지었지만 500평에 기껏해야 5가마 밖에 나오지 않았어. 그러던 이곳에 삼가저수지가 생겨났고, 통일벼가 들어오면서 배부르게 됐지. 가난하던 이 마을에 보릿고개가 없어질 줄 누가 알았겠어.”
이정옥 할머니의 얘기처럼 탄부면 상장1리는 많은 것이 변했다.
뱀도 타 죽을 정도로 가물고 척박한 땅이었지만 이제는 군내 최대 친환경농업지구로 새로운 변화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렁이 농법으로 새로운 변화 추구
2007년, 탄부면 상장1리는 친환경 농업지구로 지정됐다.
당시 34ha, 45농가가 참여해 우렁이 농법을 시작했고, 지난해에는 155ha, 154농가로 확대돼 대규모 친환경 농업단지가 조성된 것이다.
“처음에는 제초 때문에 걱정이 많았죠. 하지만 우렁이 농법을 시작하면서 생각보다 제초 효과가 높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관리만 잘해도 80∼90%까지 제초효과를 거둘 수 있고, 수확량도 관행 농법보다 많은 농가들도 나오고 있습니다.”
상장1리를 중심으로 한 친환경쌀 작목회를 이끌고 있는 염기태 회장은 올해 새로운 변화를 시도한다.
바로 무농약 재배다.
“현재도 관행 농법으로 농사를 지은 쌀보다 가마 당 5천원 정도 높은 가격을 받고 있지만 소비자들에게 저 농약은 의미가 없습니다. 지난 2년 동안이 친환경 농법의 발판을 다졌던 기간이라면 올해는 무농약 재배를 통해 경쟁력을 확보해 나갈 계획입니다.”

#노인 공경, 마을 발전의 원동력
어르신들과 한참, 마을에 대해 얘기하고 있을 때다.
마을회관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가리런히 모은 손에 반쯤 허리를 굽힌 채 정중히 인사를 올리는 김복순 부녀회장의 모습이 여느때보다 조심스러워 보인다.
콩나물을 한 봉지 내려 놓은 뒤 “방이 따뜻하세요?”라고 여쭙는 김 회장의 모습에서 마을 어르신들을 생각하는 젊은이들의 고움 마음씨가 묻어난다.
이런 마을 젊은이들의 노인 공경심은 마을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면 다 똑같이 어렵지. 하지만 우리 마을 젊은이들은 달라. 어려워도 노인들을 위하는 마음이 얼마나 고마운지......”
올해 81살이 된 김옥자 할머니의 얘기다.
젊은이들의 노인 공경은 주민화합으로도 이어졌다.
마을회관은 매일 점심때만 되면 노인회 회원 모두가 참가한 가운데 함께 식사를 하는 공간으로 변했고, 매년 실시하는 경로잔치는 마을 주민 모두가 참여하는 축제의 장이 된다.
특히 송민헌(63)씨와 경헌(53), 왈헌(50)씨 형제들로 구성된 3형제 밴드는 마을행사가 열릴 때면 빼 놓을 수 없는 초청인사다.
음악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고 끼가 넘치는 송민헌씨 3형제.
상장1리의 젊은 주민으로써 마을 어르신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애환 깃든 ‘주초배기’
상장리의 옛 이름은 ‘주초배기’다.
지금도 상장리라 하면 어디인지 잘 모르는 어르신들도 ‘주초배기’라 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만큼 오랫동안 마을을 상징했던 이름이다.
하지만 이 ‘주초배기’란 이름에는 일제 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담고 있다.
“일제 강점기, 일본사람들은 우리나라의 맥을 끊어놓기 위해 산줄기를 자르기도 했고, 커다란 철심을 박아두기도 했지. 우리 마을이 바로 그런 마을이었어. 큰 인물이 나지 못하도록 커다란 주춧돌을 땅에 박아 놨지. 주춧돌을 박아 놓은 마을이라고 해서 주초배기라 불리웠지.”
올해 81살의 김옥자 할머니가 들려 준 마을 지명에 관한 얘기다.
일제 강점기의 아픈 역사가 담겼던 ‘주초배기’란 지명은 이제 ‘상장리’로 바뀌었다. ‘상장을 많이 받아서 상장리가 됐다’는 재미있는 의미도 함께 담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