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칼바람이 몰아치는 영하권의 날씨가 이어졌지만, 시간의 흐름을 어기지 못하는지 경칩을 알아봤다.
모처럼 따뜻함이 느껴지는 날이었다. 차안에서는 창문을 살짝 열고 달리기도 했다. 겨울동안 황량한 기운이 겉돌았던 들판에 파릇파릇한 보리이파리들이 돋아 나온다.
겨우내 산그늘이 드리웠던 계곡의 얼음도 어느새 녹았다. 3월이니 이젠 정말 봄기운이 대지에 감돌 것이다.
봄기운이 물씬 풍기는 날 찾아 간 곳은 보은읍 대야리, 자연마을 명으로는 대미라고 불리는 마을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마을 이름이 대미라고 하는데 특별한 어원을 찾을 수가 없다. 지명지에서는 일제 치하였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해 큰 산 밑이므로 대미 또는 대야(大也里)라고 했다고 한다.
여기서 대야의 ‘야(也)’는 어조사 ‘야’다. 특별한 의미가 없는 것이다. 큰 산 밑이라고 했는데 왜 어조사 ‘야’를 마을이름에 썼을까?
대미마을로 불리었으니 대야 대신 대미마을을 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야리에 있는 각종 지명이 참 재미있다. 버무기골은 윗대미 남쪽에 있는 골짜기를 말하는데 옛날 범이 자주 나타났다고 한다. 지금은 이용도가 없지만 대야리에서 삼년산성을 통과해 성주리로 넘어가는 성재도 있었다. 옛날 홀아비가 여자들과 같이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기가 부끄러워 소나무 숲 밑에 있는 바위 샘에서 혼자 빨래를 했다고 하는 솔목도랑도 있다.
아랫대미에서 장안면 오창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미루고개는 미륵이 있었다고 전해온다. 옛날 고려장을 하던 곳으로 알려진 윗대미 동남쪽에 있는 준호골은 오늘날 공동묘지가 됐다.
마을 최고령자인 김일동 할아버지(88)와 할머니 중에서는 84세인 김순기 할머니가 최고령자이고, 주민 상당수가 70대 어르신들인 이 마을은 현재 40가구 7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이장은 박연숙(61)씨, 노인회장은 김현식(68)씨, 부녀회장은 오평림(38)씨, 지도자는 정기준(50)씨가 맡고 있다.
# 도로변에 새마을 조성
대미로 불리는 대야리는 70년대까지만 해도 현재 큰 소나무식당이 있는 곳에 조성돼 있었다. 그리고 현재 마을이 조성된 곳은 논과 밭 등 농경지였다.
그러다 1974년 새마을사업이 한창일 때 군은 농경지였던 지금의 마을로 이주사업을 추진, 윗마을에서 도로변으로 이주시켰다. 당시 18가구가 이주하고 10여 집이 내려오지 않았다.
이주한 집은 집집마다 150만원에서 200만원 등 국민주택자금을 5년 거치 15년 상환 조건으로 융자받아 주택을 신축 이전했다.
주민들은 한 달에 2, 3만원씩 갚아나가기 시작했다. 150만원, 많아야 200만원이니 지금 같아서는 1년 안에 다 갚을 수 있는 금액이지만 1970년대 200만원은 엄청난 규모이기 때문에 한 달에 2, 3만원씩 갚는 것도 사실은 부담이 되는 금액이었다.
매달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상환해나갔다. 20년 동안 융자금을 모두 상환한 집은 농협 담보물에서도 해제돼 온전히 내 집이 됐을 때 주민들은 가슴이 벅찼다. 그동안 융자금을 갚느라 고생했던 것이 주민들에게 큰 보람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도로에서 윗대미까지는 1㎞이상 걸린다. 시장을 보고 윗대미까지 걸어가는데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장날 이것 저것 물건을 사고 윗대미까지 가려면 가다 쉬다를 몇 번씩 해야 하는지 모른다.
아랫대미 사람들은 그래서 그 땐 힘들기도 했지만 아랫대미로 이주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처음 윗대미 마을을 아랫대미로 이주시켰을 때 윗대미 마을엔 10여가구 남았었다. 아랫대미로 이주한 주민들은 윗대미 집을 그대로 두고 이주했었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난 지금 윗대미는 15가구로 늘었다. 윗대미를 떠나지 않은 토박이 주민에 더해 외지에서 들어와 터를 누르고 살기 때문이다.
5, 6명 정도 되는 외지인들은 사실 마을과는 아무 연고가 없는데도 이 마을에 들어온 사람들이다. 마을 풍경이 좋고 또 땅값도 싸기 때문에 들어온 것이다. 현재 이장을 보고 있는 박연숙 이장도 6년 전 대전에서 이 마을에 들어온 케이스다.
일자리를 찾아, 자녀 교육을 위해 이농하는 가구가 늘고 있는 것이 마을과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박연숙 이장은 문구회사인 동아연필 생산과장까지 지낸 커리어우먼이었다. 남편은 약사다.
작고한 보은약국 노재현 약사와의 인연으로 대전에서 약국을 접고 전원적 삶을 위해 보은으로 이주한 것이다. 두 부부는 이 마을에 살면서 논일도 돕고 밭일도 돕고, 또 직접 채마밭도 일구며 농촌생활에 접어 들게 됐다.
이렇게 농촌생활이 익숙해질 무렵 주민들이 박연숙씨에게 마을 이장을 맡겨, 1년만 본다는 것이 벌써 3년이나 됐다.
박연숙 이장은 타 지역에서 들어온 사람인데다 여자인데 누가 이장을 시키나, 우리동네는 그만큼 연세가 높으신 어르신들도 사고가 깨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라며, 이장이 되고서는 협동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 주민간 단합을 위한 일을 염두에 두고 일을 본다며 작은일도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어 이장을 보는데 어려움이 없다고 말했다.
마을 주민들도 마을을 위한 일이라면 남자 이장들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나서고 행정기관에 요구할 일이 있으면 강력하게 요구해 마을 발전에도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칭찬했다. 그래서 정자도 읍내에서 제일 먼저 사업을 따올 만큼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다.
박연숙 이장은 “귀농하는 사람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환영을 해줘야 하는데 동네에 들어왔다가도 지역과 단절돼 다시 도시로 돌아가는 예가 있다”며, “외지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지역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행정기관이나 주민들이 관심을 기울여 줄 것”을 바랐다.
# 문화재 보호구역 피해 커
그동안 마을 주민들에게 자부심을 줬던 삼년산성으로 인해 주민들은 지금 골머리를 앓고 있다. 성곽을 경계로 할 때 직선거리로 불과 100m도 안된다. 윗대미 마을은 이보다 더 가깝다. 이로 인해 주민들이 겪는 피해가 보통 큰 것이 아니다.
성곽 500m 이내는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이 안에서는 각종 개발행위가 제한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성곽으로부터 100m도 안되는 곳에 위치한 대야리는 땅을 매물로 내 놓아도 구입하려는 의사를 가진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재산권 행사에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다고 한다.
주민들은 삼년산성으로 인해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묶였지만, 정작 대야리 쪽은 성곽조차 보수하지 않으면서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묶어 논과 밭을 매물로 내놓아도 누가 와서 농경지를 사겠다고 하지도 않을 정도로 주민들에게 피해만 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삼년산성 문화재 보호구역에 포함된 마을과 연대해 문화재 보호구역에서 해제 및 규제 완화를 촉구하는 진정서라도 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삼년산성은 분명 우리지역의 소중한 문화자산으로 잘 보전해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하지만 주민 재산권 행사에 걸림돌이 되고 있으니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슬기로운 방법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같았다.
# 암반관정 필요
특별히 오염 요인이 없기 때문에 먹는 물은 별 문제가 없겠다 싶었는데, 음용수로 이용하고 있는 지하수에 이상이 있는 것이 발견됐다고 한다.
얼마 전 군에서 몇 가구를 대상으로 수질검사를 했는데 결과가 안 좋게 나왔다는 것. 그래서 물을 끓여먹고 또 일부 주민들은 1, 2㎞ 떨어진 외부에서 물을 길어다 먹고 있는데 너무 불편하다는 것.
주민들은 깨끗한 물을 안심하고 물을 마실 수 있도록 암반관정을 개발해줄 것을 바라고 있다.
그러면서 축사로 인해 동네 주민들이 피해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 동네에 양계장도 있었는데 2년전 새로 신축해서 한다는 것을 주민들이 반대해 양계장이 운영되지 않고 있다는 것. 하지만 아직 돈사는 그대로 마을 내에 있어서 여름철이면 냄새 때문에 창문을 제대로 열어놓고 생활할 수 없을 정도로 불편을 겪고 있다고 호소했다.
안정적인 농업소득을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소득작물로 가축을 빼놓을 수 없다. 가축사육은 가정경제를 풍족하게 하는 생계수단인데 주민들의 쾌적한 생활과는 배치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금 이 문제는 정말 풀기 어려운 숙제가 되고 있다.
취재를 갔을 때도 경로당에서는 주민들이 모여 김치전을 부치고 생미역을 다듬는 등 맛난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처럼 겨울철 경로당은 주민들에게 친목도모의 공간이요, 더 없는 놀이공간이다.
기름값 아까워 난방도 못하고 찬 기운만 겨우 면한 곳에서 지낼 수밖에 없을텐데, 경로당에 모여 심야전기이니 난방비 걱정없이 따뜻하게 지내면서 점심, 저녁을 같이 해먹고 이제 일철이 다가왔다며 어떻게 일을 할지 걱정도 하는 등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지루하지 않게 하루를 보낸다.
정말 생각해보니 곧 바쁜 농사철이다. 한미 FTA 영향 및 국제 곡물가격 인상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농민들은 생산비는 많이 드는데, 소득이 없는 불균형의 농사를 또 지어야 하니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이러한 농민들의 고충을 새 정부에서 해결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