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지으며 욕심 없는 주민들이 사는 하늘 아래 첫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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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지으며 욕심 없는 주민들이 사는 하늘 아래 첫 동네
  • 송진선 기자
  • 승인 2008.02.22 16: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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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탐방(122) 내북면 세촌리 느리울

하루가 다르게 온도가 올라 봄기운이 꾸물거리며 대지 위로 올라오고 있지만 내북면 세촌리 길목에 있는 상궁 저수지는 아직은 한 겨울 모습이었다. 좀처럼 깨질 것 같지 않게 꽁꽁 얼어 있다. 얼음 낚시를 즐기는 강태공들의 천국이었다. 낚싯줄에 걸린 빙어를 연신 잡아 올린다.

우수가 지났으니 저수지도 곧 녹아 푸른 물결이 넘실댈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마을을 찾았다.
도로변에서는 세촌리를 찾아볼 수가 없다. 이정표를 따라가 안으로 구불구불한 길을 4, 5㎞ 정도 들어갔다.
올망졸망 주택들이 모여있는 전형적인 마을이 나타난다. 세촌리다. 그야말로 하늘아래 첫 동네였다.
오후 햇살이 마을에 가득 쏟아져 보은읍내는 물론 세촌 아랫동네인 상궁리 보다 해발이 높은데도 참 따뜻했다. 아늑하고 평화롭다는 생각을 하며 어떤 사람들이 살까 마을을 노크했다.

아직 겨울 농한기를 즐기고 있는 주민들은 경로당에 모여있었다.
이렇게 경로당에 모여 하루 일과를 같이 하면서 “나는 무릎이 쑤셔서 죽겠어 밤에 잠도 못 자겠어” “내일 병원에 같이 가서 물리치료나 받자구” “올해 고추 종자는 무엇으로 할껴, 우리도 같은 것으로 하게” 등등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나누게 된다.

바깥마을 18가구, 안 마을 7가구 총 25가구 52명의 주민들은 성낙서(66) 이장과 김홍래(75) 노인회장, 강분순(56) 부녀회장과 함께 서로 화합하며 가족같이 화기 애애하게 지내고 있다.

# 마을이름은 원래 누리울
보은의 지명지에 의한 마을 연혁을 보면 경주 김씨가 대대로 살고 있어 세촌(世村)이라고 했다는데 원래 이름은 누리울이다. 누리울은 세상(世上)의 옛말로 현재 느리울이라 불리는데 누리울이 변해 느리울이 됐다고 한다.

마을로 들어오면 사방이 산으로 막혀 있다. 또 현재 이용하고 있는 진입로 쪽은 평지이지만 그 외에는 산을 넘어야 외부와 닿을 수 있는 고립된 지형이다. 이렇게 외부에 노출되지 않으면서 안으로는 오염원이 없어 도랑물까지도 먹었을 정도로 물이 좋고 또 저수지 없이도 농사를 지을 정도로 풍부한데다 농경지까지 넓게 분포돼 있으니 사람이 살기에 좋은 또 하나의 세상이었던 셈이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니 산채가 많이 나오고 감나무도 많다. 물이 깨끗하고 오염원도 없는 두메산골 세촌리는 4, 5년 전 과천시와도 자매결연을 맺었고, 지난해에는 한국 전기안전공사와도 결연을 맺었다.

이들은 봄에 산나물을 채취하러 오고 마을 농산물을 구입하고, 또 전기안전공사에서는 일손 돕기와 전기시설도 점검하고 수리해주는 등 결연 사업을 전개하고 있지만 아직 활발하지는 않다.

그러나 개발 지상주의에 놓여있어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요즘, 오염되지 않은 이 마을을 찾아 자연을 체험하려는 도시민들의 발길이 분주해질 것으로 보인다.

# 시내버스가 들어와 편리
내북 상궁에서 수한 차정까지 이어지는 도로에서 마을까지 3, 4㎞ 들어와야 하는 세촌리는 그야말로 오지 중의 오지다. 행정구역이 회북면, 지금의 회인면에 속해있었을 때 주민들은 마을 서쪽인 한 고개를 넘어서 회인 장을 이용하고 회인면사무소에서 주민등록 등본을 떼는 등 행정 일을 보았으며 학생들도 고석리에 있는 회동초등학교(현재는 폐교)를 다녔다.

버스도 다니지 않았을 때 이려니와 시내버스를 이용한다해도 마을 앞 도로까지 걸어나가 수한면 차정 사거리에서 다시 수리티재를 넘어야 회인면 소재지에 닿아야 하니 주민들은 지름길인 한 고개를 넘어 다녔던 것이다.

내북면에 속해있다면 이 같은 불편이 해소되는 것이니 주민들은 내북면 편입을 희망해 1983년 행정구역이 조정됐다.

걸어다녀도 이 같은 불편이 해소됐는데 수년 전부터 마을에는 시내버스까지 들어와 주민들의 발이 돼 주고 있다. 마을에서 군도까지 3, 4㎞에 걸어나가 버스를 타야 하는 불편이 사라진 것이다.

주민들은 버스가 다시 돌아나갈 수 있는 공간까지 확보해 버스를 유입시켰다. 그리고 버스 회차 공간에는 다른 차량들이 주차해 버스를 돌리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차금지 안내판까지 설치했다.

겨울에는 버스가 들어오지 않아 교통이 두절되는 예가 많다. 버스가 통행하는 길은 산 그림자로 인해 햇빛을 받는 시간이 적어 여간 날이 풀리지 않으면 눈이 녹지 않기 때문이다.

취재를 간 날도 시내버스가 다니는 길에는 많이 녹았지만 그래도 얼음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마을에 주민수가 많고 또 젊은이들이 많았을 때는 주민들이 직접 눈을 치우기도 했으나 지금은 주민 대부분이 노인이고 트랙터 등의 농기계가 없어 눈을 치우는 것을 포기했다.

그래서 마을에서 군에 모래주머니 보급을 요구했으나, 올해는 한 번도 확보하지 못해 올 겨울에도 여러 날 시내버스가 들어오지 않아 주민들의 발이 묶이기도 했다.

그래도 주민들은 크게 불평하지 않고 그저 눈이 녹기만을 바랐다고 한다. 자연의 이치로 그냥 받아들이는 주민들의 순박한 마음이 읽혀졌다.

# 농경지 대부분 휴경
지금은 벼농사와 잡곡, 고추가 주작이지만 과거에는 주민의 80%이상이 경작했을 정도로 담배고을이었다. 조금이라도 작물을 심을 수 있는 공간은 모두 일궈 담배를 심었다. 자식 공부시키고 생계비를 마련하는데 밑천이 돼준 효자작목 담배는 1996년 이한준씨를 마지막으로 폐작(閉作)하면서 마을에서 완전히 없어졌다.

이렇게 자투리땅까지 일궈 농작물을 재배했던 세촌리는 지금 상당한 면적이 휴경 중이다. 성낙서 이장이 꼽는데 논의 50%, 밭의 30%이상이 휴경지라고 한다.

휴경 농지는 대부분 농업용수 확보가 안된 천수답이거나 농로 확보가 어려운 산림 연접지의 밭 등인데 세촌리는 조금 달랐다.

마을 진입로 변에 있어 농사짓기가 좋고 개울이 흘러 농업용수 확보에도 어려움이 없었을 법한 논도 잡초가 무성하고 일부는 버드나무가 자라는 등 묵힌 흔적이 역력했다.

왜 휴경지가 많을까. 이유는 굳이 농사를 짓지 않아도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 즉 자식들이 “거동도 힘이 드는데 어떻게 농사를 짓느냐”며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요즘 농사는 사람의 손보다는 기계가 해야 하는데 1년 농사져야 기계 사용료에다 비료, 농약 등 각종 영농자재비를 제하고 나면 남는 게 없고 오히려 신체질병만 얻는데 무슨 농사를 짓느냐는 게 자식들의 생각이다.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는 자식들은 매달 용돈을 송금해주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것 같다. 지금 농촌 들녘을 지키고 있는 영농인력 상당수가 6, 70대의 고령이다. 이들의 영농능력이 크게 떨어지고 작업능률이 오르지 않는 데다 하루 일하고 다음날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 받고, 또 일하고 다음날 물리치료를 받는 등 악순환을 계속하고 있는 현실이다.

1년 농사를 지었다고 해서 연말에 손에 쥐는 돈은 거의 없는 것이 요즘 농부들의 주머니 사정이다. 그래도 농사로 잔뼈가 굵은 우리네 어머니, 아버지들은 그 일손을 놓지 못하고 들녘을 떠나지 못한다.

# 볏짚이 남아있다
요즘 논에서 거둬들이지 않는 볏짚을 구경하기가 힘들다. 가을철 벼 탈곡을 하면 곧바로 볏짚 묶는 작업에 들어가 소 먹이용으로 저장해둔다. 최근 논에 인삼포가 조성되고 과수원으로 조성되는 예가 많아 볏짚을 구하기 힘들어진 축산농가들은 진천, 멀게는 전라도까지 가서 볏짚을 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곳에는 벼 낟가리 쌓은 것처럼 논에는 볏짚이 그대로 있었다. 이 마을에서만 볼 수 있는 색다른 풍경이 아닐까 싶다. 이같이 아직 볏짚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은 이 마을에는 소를 사육하는 농가가 없기 때문이다.

설사 외지인이 들어와 땅을 구입해 축산을 할 수도 있는 현실이지만, 주민들은 축사 등의 입지를 철저히 막고 있다. 그냥 논에는 벼농사를 짓고 밭에는 밭작물을 재배하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자연상태 그대로를 보존하겠다는 의견 때문이다.

# 돌기와 생산했었다
마을이 원래 청석, 즉 돌기와가 많이 분포돼 있다. 지하로 1m이상만 파고 내려가면 청석이 깔려 있다고 한다.

옛날 초가지붕이 대부분일 때 돌기와 지붕을 얹은 집은 그래도 부잣집으로 쳤었다. 왜냐하면 청석이 비쌌기 때문에 서민층은 아예 꿈도 꾸지 않고 해마다 볏짚을 엮어 지붕을 해 잇는 것으로 만족했었다.  청석이 많이 났지만 이 마을에도 돌기와집은 5집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렇게 청석이 돈이 되는 광물이어서 과거에 한 업자가 청석이 많이 매장돼 있는 경주 김씨 종중 임야를 임대해 청석을 캐내기도 했었다. 얼마 안가 중단했지만 그 바람에 산만 망쳤다고 한다. 채석장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곳은 나무가 무성하고 계곡도 있어 피서지로 제격이었으나 그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재물을 모으기 위해 아등바등하지 않고 없으면 없는 대로 자족하며 최대한 자연 친화적으로 살아가는 주민들에게 그곳을 볼 때마다 아물지 않는 상처가 되고 있다. 개발지상주의로 잃고 있는 많은 것들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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