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98)-탄부면 성지리(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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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탐방(98)-탄부면 성지리(망지)
  • 보은신문
  • 승인 2007.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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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못에 그물 친 형상이라 망지
성지리는 면소재지로부터 남서쪽으로 3㎞ 떨어진 면의 남부에 위치해 동은 대양리, 서는 삼승면, 남은 마로면, 북으로는 보청천을 건너 덕동리에 접해 있다.

이곳의 옛 지명인 망지는 그물 망(罔)자 망지로서 풍수지리적으로 마을의 형상이 못에 그물을 친 듯 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로면 오천리와 경계를 이루는 마을 뒷산은 두 팔을 활짝 벌린 듯 길게 펼쳐져 있어 마을을 품에 감싸안는다.

이 산의 능선이 마을 중앙으로 뻗어 내린 가름재를 중심으로 동쪽의 큰 망지와 서쪽의 작은 망지가 자연마을을 이룬다.

마을이 이루어질 무렵 마을 중앙의 가름재에 명당이 있다는 말이 구전되어 오던 중 도승 한분이 마을을 지나다가 이곳에 묘를 쓰면 마을이 이롭지 못하다고 하여 주민들이 분묘를 못하도록 명당자리라는 곳에 엄나무 말목 4개를 박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박은 엄나무가 성장하여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세 그루는 노목으로 소멸되고 한 그루는 현재까지 남아 둘레가 3.7m에 달해 성인이 크게 팔을 펼쳐도 다섯 아름은 족히 돼 보일 정도다.

또 마을 입구에는 엄나무 크기에 버금가는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그 모습이 결코 평범하지가 않다.

마을 진입로를 따라 걸어가니 저 만치에 몇 백년인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느티나무가 그야말로 웅장하게 서 있었다.

흙을 뚫고 솟아오른 몸통이 여러 가닥으로 갈라져 수많은 가지를 만들어내고 그 가지며 이파리의 전체 형상이 동그래서 어디에서 보나 원형으로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사방 어디에서 봐도 흐트러지지 않는 둥근 형세가 독특해 주민들은 근방 몇 백리 어디에서도 이만한 느티나무를 볼 수 없을 거라며 대견해했다.

특별한 소득작물이 없는 성지리는 감나무를 재배하는 농가가 4가구 있다.

지금은 재배농가 전체 감나무 수가 1500주이지만 밭에 돌이 많긴 해도 토질이 좋고, 기후 조건도 적합해서인지 감 농사가 잘 돼 밝은 전망을 내다본다.

눈이 오면 생전 안 녹고, 비도 많이 오고, 5월 초에도 서리가 내리고, 날이 추우니 산나물도 늦게 난다고 한다. 주민들은 마을이 북향이라 그런가 아님 산이 마을을 막고 있어서 그런가 짐작은 해보지만 확실치는 않은 듯하다.

장병만 이장은 마을 앞으로 지방도 502호선이 지나가는데 교통량도 많고, 마을이 아늑하고 경치가 좋아 성지리만의 특징을 살려 뭔가 소득사업을 해보면 좋겠다며 혼자만의 생각이긴 하지만 마을이 좋은 쪽으로 발전할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마을 입구에서 마을 안길까지 난 진입로는 커브가 많고 길이 협소해 마주 오는 두 대의 차량이 불편 없이 통과하기에는 약간의 어려움이 따른다. 대형차량은 마을 진입을 꺼린다고 한다.

느티나무 앞에 있는 조립식 경로당 대신 새 건물을 짓고, 느티나무 주변으로 자연경관에 맞게 쉴 공간을 조성하고, 주차장도 마련해 주민들이 좀더 편하게 생활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성지리는 보덕 중학교 시절 씨름을 시작해 금강장사 2차례, 한라장사 1차례의 경력을 갖고 있는 남재현 장사(44)를 배출한 마을이기도 하다.

마을 봉사자로는 장병만(60) 이장과 강헌구(72) 노인회장, 박경숙(57) 부녀회장, 김태성(51) 새마을지도자가 있다.

# 지금은 사라진 동제
마을 입구의 느티나무와 가름재에서 동네를 굽어보고 있는 아름드리 엄나무 그리고 엄나무에서 200m 정도 더 올라간 곳의 아카시아 나무는 한때 주민들이 동제를 지내며 소원을 빌었던 나무이기도 하다.

동제를 지내기 위해서는 정월 초하루에서 초사흘까지 사흘동안 지낼 마을 동제(부락제)의 공양주를 선별하는데 부부의 모든 사주가 정월 초사흘과 운이 맞아떨어져야 할 뿐만 아니라 몸에 종기나 흉터 같은 작은 상처 하나도 있어서는 안될 정도로 선별 기준이 까다롭고 엄격했다.

다음해의 마을의 복락과 안녕을 떠맡을 정결한 공양주 부부가 선별되면 마을 주민들은 공양주 집에 모여들어 싸리문에 서둘러 금줄을 치고, 매일같이 물을 길어 밥을 짓고 물을 마시던 마을 어귀의 우물을 공양주만이 사용할 수 있는 독샘으로 지정해주었다.

두 부부는 정월 초사흘이 될 때까지 담배, 술 등을 일체 하지 않고 집안에서만 기거하며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해야했다. 엄동설한 겨울, 독샘으로 지정 받은 곳에서 부부는 매일 밤 얼음물을 길어 올려 달빛 정기를 쐬며 목욕을 한 후 속옷부터 깨끗이 갈아입은 후에도 부부관계를 금해야 함은 물론이다.

마을주민 전체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극진히 동제사를 준비했던 것이다.
마침내 초사흘 달이 뒷산위로 둥실둥실 떠오르면 마을주민들이 어물을 흥정해 온 고기, 떡, 술 및 만수향을 지게에 짊어지고 공양주 부부는 단둘이서 가름재로 올랐다. 가름재에 있는 아름드리 엄나무를 지나서 매년 동제사를 올리던 산지당에 도착해 준비해온 음식을 산지당에 펼쳐놓고 축문을 읽은 후 제사를 지냈다.

간밤을 지새우며 쓴 마을 주민들의 이름을 적은 소지종이를 잡고 개개인을 일일이 열거하며 그들의 생사복락을 빈 후 그 소지종이를 하나씩 허공위로 날려보낸다. 한해의 무사태평이 여기에 달려 있어 소지종이를 날려보내는 공양주의 간절한 마음은 하늘에 맞닿아 있다. 객지 나간 자식 걱정, 농사 걱정, 주민들의 모든 희노애락, 그리고 한해의 평범한 바램, 경건한 마음으로 동제를 함께 준비해온 마을 주민들의 모든 소망이 날아오르는 소지종이에 담겨 있는 것이다.

공양주 부부가 산제당에서 내려오면 산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주민들은 한해의 고비를 이미 넘긴 듯 모든 걱정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공양주 집에 모여들어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하며 동제사를 지냈던 떡과 술을 나누어 마시고 춤을 추며 어화둥둥 잔치를 했다.

76년까지 계속되어 온 성지리의 부락제 전통은 70년대 한창이었던 새마을운동으로 인해 멈춰졌다. 미신타파를 외치며 옛날의 답습을 버리자는 운동 속에 동제도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이다.

동제는 미신이요 불합리한 것이며 현대에 있어서는 한낱 무지한 일에 불과하다는 인식으로 사라지긴 했으나 그 이면에는 동제를 통해 주민들이 이웃의 고민을 같이 염려하고, 소망을 같이 기원하는 따스하고 돈독한 화합을 이루어 나가고자 하는 의미도 담겨져 있었다.

모두 한마음이 되어 같이 염려하고 걱정하며 소원을 빌어주웠던 그들의 모습은 모든 것을 떠나 그 자체만으로 물려받아야 할 소중한 유산이리라.

조금이라도 양보하고 나누며 더불어 살기보다는 갈수록 내 이익만 앞세워 제각각 살아가려 하는 요즘 조상들이 살아온 옛 이야기를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진 않을까.

# 귀농하는 발길 이어져
70호를 넘었던 마을은 이제 32가구만이 마을을 지킨다.
많은 사람들이 떠나긴 했지만 성지리 마을에 반해 살고자 찾아드는 이들도 있다.
96년 귀농한 장병만 이장을 비롯해 2가구가 더 있다고 한다.
장병만 이장은 올해로 7년째 이장을 맡고 있으며 부인인 박경숙씨가 바로 부녀회장이다.
그는 처음에 들어와 심었던 대추나무가 병이나 다 캐내고 지금은 감나무를 재배한다고 했다. 자신의 밭에 쑥쑥 자란 마늘을 가리키며 "우리 마늘 좋죠?"라고 자랑스레 묻는 그에게서 농부다운 순박함이 느껴졌다.

몇 십 년을 함께 살며 남의 집안 속사정까지 훤히 알고 지내온 주민들과 같이 어울리며 스스럼없이 지낸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성지리에 터전을 잡고, 땅을 일구고, 새롭게 만난 사람들과 매일 마주치며 살다보니 이제는 서먹한 사이가 아니라 먹을 거 나눠먹고, 심심함을 덜어주는 친한 이웃이 되었다.

지금은 세 가구지만 앞으로 마을로 찾아드는 사람들이 더 많아져 63명의 주민이 80명으로 늘어나고 100명을 훌쩍 넘기는 날도 오리라 생각해본다.

마을 어귀의 느티나무처럼 마을이 풍성하게 번성할 날이 기다려진다.

김춘미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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