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로면 관기리(1) -관터(官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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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면 관기리(1) -관터(官基)
  • 송진선
  • 승인 2005.07.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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館基라 불리다 官基로 개칭된 마로면 소재지
어느 마을 치고 유서가 깊지 않은 곳이 있을까마는 마로면 관기리 만큼 유서 깊은 곳도 드물 것이란 생각이다.

보은에서 상주방향에 위치한 관기리는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마로면의 옛 지명인 왕래면(旺來面)이 마을 이름에 크게 작용했다.

고려 31대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안동에서 있다가 상주를 거쳐 청주로 가는 길에 왕래원(王來院 : 왕이 머물렀던 집)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왕래원이 있었던 곳이 현재의 관기리이고 왕래원의 집 원(院)을 원용한 집 관(館)자를 써서 관터(館基)라 부르다가 1914년 벼슬 관(官)으로 바꿔 관기리(官基里)가 되었다.

또 공민왕이 지나간 고개는 왕래재라 불리는데 관기리에서 소여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지칭한다. 예전에는 소여리에서 관기리를 올 때 이 고개를 넘었지만 지금은 군도와 지방도 개설로 이 고개는 무인지경이 됐다.

공민왕과 관련된 이같은 유적이 지금은 사람들의 입에 의해서 전해지고 있고 지명지나 군지 등 문서로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해당 유적지에 표지판이라도 설치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관기리는 행정마을로 3리까지 분리돼 있다.  이번 호에서는 관터 지명을 사용하는 관기1·3리를 소개한다.

관기1리(이장 구충회, 58)는 132세대 395명의 주민이 주로 영농에 종사하고 있다. 새마을 지도자는 구갑회씨이며 부녀회장은 한영순씨, 노인회장은 김광수씨가 맡고 있다.

1919년에 개교해 86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관기초등학교가 위치해 있으며, 관기우체국과 군내 면단위에서는 최초로 80년대 5층 규모의 아파트가 건립된 지역이다.

당초 이곳은 적암리에 소재한 보은 위성지구국 직원들이 거주하는 사원아파트로 처음에는 실제 직원들이 거주했으나 점차 인사 이동 등으로 인해 도시로 나가면서 아파트 소유주인 KT에서 사원아파트 용도를 폐지하고 2003년 일반인들에게 분양했다.

또한 소여탄광이 번성했던 때 사택이 운영됐으며 잎담배 생산이 많았을 때에는 지도원이 거주하는 사택과 담배 수납창고도 관기1리에 있었다.

162세대 446명이 주민이 살고 있는 관기3리(이장 최상길)는 새마을지도자 김판수씨, 부녀회장 유춘자씨, 노인회장은 최상철씨이며 5일장이 열리는 시장이 있다.

면사무소가 위치해 있고 마로농협, 마로신협, 파출소, 보건지소 등 각종 관공서가 3리에 위치해 있다.

면사무소 앞쪽으로 과거에 우시장이 있었으며 5일장이 열렸다. 시장이 번성해 면사무소 앞, 마로농협 앞쪽의 시장터가 비좁아 현재의 5일장이 서는 쪽에 장이 형성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 4일과 9일에 열리는 관기장은 김천→상주→화령시장 다음에 열렸으나 교통이 나빴던 과거에는 시장 규모가 매우 컸고 또 김천, 상주에서 청주로 가는 중간기점에 있었던 것도 규모 있는 시장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도로여건과 교통수단이 좋아지면서 관기장은 쇠퇴의 길을 걸어 우시장은 1983년경 폐쇄되었고 5일장 규모도 겨우 명맥만 유지될 정도다.

현재와 같이 관기 1·3리로 나뉘기 전까지는 관기1리 단일 마을이었는데 1985년 10월 관기1리를 관기1리와 3리로 분리 당시 1리 이장은 구광서씨, 3구 초대이장은 최준교씨가 맡았다.

■ 능성 구씨 세거지
북실 김씨, 선우실 최씨, 관터 구씨, 새실 구씨, 눌곡 박씨 등은 우리 지역의 대표적인 집성으로 경주 김씨 등 본래 다른 지역명을 쓴 본이 있으면서도 우리 지역이름을 쓰고 있다.

하나의 성으로 집성을 이뤘다는 것은 씨족사회였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 지역을 지배(?)했던 반상의 흔적이기도 하다.

관터 구씨도 여기에 다름 아닌 것으로 능성 구씨 세거지(勢居地)이다. 과거에는 거주 주민의 7, 80% 이상이 능성 구씨일 정도로 구씨가 득세를 했다.

지금은 성씨 분포도가 다양해졌지만 아직도 세거지인 관터에 능성 구씨가 터를 잡은 것은 병암 구수복 선생의 연이 크다.

중종 14년인 1519년 기묘사화 이후에 병암 선생이 바로 관터에서 은거하며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를 배출해냈으니 구씨 세거는 486년에 이른다.

봉건제 사회의 신분제도인 반상(班常 : 양반과 상인)문화가 뚜렷했을 때 반에 속했던 관터 구씨들이 주거공간이 대부분 고택이었다.

그래서 다른 지역보다 고택이 많았었고 슬래브지붕에 시멘트 콘크리트 주택이 일반화된 지금으로 볼 때는 문화재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고택들은 대부분 다 헐리고 현대식 주택으로 변했지만 관터 구씨의 세거 역사를 보여주는 일부 옛 기와집이 남아있다.

그 중 구자록씨 소유의 집은 유명하다. 일제시대 때 주재소(현재의 경찰서 기능), 농협, 우정국(지금의 우체국)으로 활용되는 등 치안, 경제, 우편 등의 업무가 이뤄지는 곳이다.

주재소는 구 마로지서 자리로 이전하고 우정국은 지금의 대륙상회와 마로신협 자리로 이전했다가 1979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됐다. 농협도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으며 행정관서인 면사무소는 현재의 테니스 코트 쯤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조선조부터 일제치하까지 온갖 역사를 다 겪은 그 집은 지금 안채는 모두 헐리고 사랑채만 일부 남아 있을 뿐이다.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졌다.

■ 80년대까지 관기 경기 불야성
지금도 마로면이 보은읍 다음으로 인구도 많고 지역세도 높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관기의 경기는 불야성이었다.

소여리와 원정리 탄광으로 관기시장은 낮에는 조용하다 밤이면 지하에서 탄을 캐던 노무자, 관리자 할 것 없이 쏟아져 시장을 이용함으로써 주점 및 찻집, 음식점 백열등이 밤새도록 꺼지지 않았을 정도로 문전 성시를 이뤘고 한 집 건너 한 집이 술집일 정도로 관기 경제가 호황을 누렸다.

300여명의 직원들이 근무했던 소여탄광은 문경, 태백에도 탄광이 있어 다른 지역에 근무했던 직원들이 소여탄광으로 발령을 받으면 본인만 오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이 함께 왔기 때문에 80년대만 해도 소여리 탄광 근처에 4단계로 산을 깎아 지은 사택이 즐비해 하나의 단일 마을이 형성됐을 정도였다.

지금도 관기리에 사택이 운영되고 있는 원정리 탄광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경제활동으로 지방세 증가 및 인구유입, 마로농협의 여수신고 규모도 다른 지역농협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는 등 마로경제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80년 보은이 대형 수해를 입었을 때 소여탄광 갱도로 물이 유입돼 갱도가 무너지는 등 큰 피해를 입었지만 이를 복구해 연탄을 캤으나 무연탄의 경제성이 떨어지고 탄을 캐기도 어렵자 83년 폐쇄시켰다. 현재는 국내 유일의 무연탄광인 원정리 (주)성하만 운영되고 있다.

관기 경제의 또 하나의 축이었던 잎담배 경작은 마로면의 대표적인 작물로 농가의 대부분이 잎담배를 경작했다.

잎담배 지도원이 관기리에 거주할 정도였고 마로면만 수납하는 별도 창고가 있었으며 수납기간이 한 달 내내 걸릴 정도로 그 양이 엄청났다. 지역 경제의 규모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잎담배 감산 정책과 고령으로 인해 재배면적이 점차 줄어들어 80년대 후반 들어 주재원이 없어졌다.

이같이 소여탄광의 폐쇄 및 잎담배 경작의 급감은 관기 시장경제 위축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80년대까지만 해도 불야성을 이뤘던 관기 시장경제는 보은시내 시장경기와 마찬가지로 지금은 파리만 날릴 정도다.

■ 관기 우회도로 개설의 명(明)과 암(暗)
관기 주민들이 지속적으로 개설을 요구했던 관기 우회도로는 결국 4차선의 우회도로 개설로 명과 암이 확연하게 나타났다.

즉 우회도로 개설로 차량과 사람이 보행자 등이 관계된 사고는 없어지는 효과를 얻은 반면 관기 시가지를 통행하는 차량이 급격히 줄어듦에 따라 상가 이용자가 없어 경제사정은 더욱 나빠지는 역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1998년 2월 착공해 2002년 6월말 완공된 관기 우회도로는 관기리 중심으로 통과하게 돼 있던 25호선을 탄부면 임한리부터 마로면 갈평리까지 3.7km를 개설, 관기리 뿐만 아니라 송현리도 완전히 우회, 관기리를 통과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과거 25호선이 관기리 중심을 관통했을 때는 상주방향과 대전방향의 차량들이 관기리를 지나며 담배나 음료수도 구입하고 삼겹살이나 소고기를 사는 등 상가들은 이들로 인해 가게 운영에 도움이 됐었다.

■ 도시계획 집행 소원
도시계획 구역인 관기1, 3리는 도시계획 선만 그어져 있을 뿐 도로 개설이 늦어져 지역개발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구충회 관기1리 이장과 최상길 관기3리 이장은 도시계획만 서있고 개발이 되지 않아 집을 한 채 지으려고 해도 자기 소유의 토지이지만 도시계획 선에 맞춰 건축해야 하고 재산권만 침해하고 있다며 도시계획도로 건설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적암천과 우회도로 사이의 유휴부지에 체육시설을 설치해 관기 주민들이 체력도 단련할 수 있도록 체육시설 설치를 요구했다.

건강한 생활을 위해 남녀노소가 운동을 하는 것이 하나의 문화 코드가 된 지금 어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체육시설 설치는 주민들의 건강증진의 도우미가 될 것이란 생각을 했다.

<새로쓰는 마을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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