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승 선우실 문화유적 (최태하 가옥·금화사· 계당·어윤중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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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승 선우실 문화유적 (최태하 가옥·금화사· 계당·어윤중 생가)
  • 송진선
  • 승인 2005.07.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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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역사 껴안고 말없이 청산처럼 살아있어
지난 10일 일요일. 한 달에 한번씩 답사 프로그램인 문화기행 일이었다.

바로 전일인 토요일에도 굵은 장대비가 내렸기 때문에 일요일까지 계속 장맛비가 내리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지만 기온도 높고 후텁지근해 기행을 하기에 나름대로 어려움을 겪었다.

7월 문화기행지는 삼승면 선곡리에 위치한 최태하 가옥, 금화서원과 계당, 어윤중 가옥.

마을 안에 위치해 있고 금화서원과 계당도 차량 출입이 가능해 다행히 후텁지근한 날씨 속에 걷는 것을 최소화 할 수 있었다.

화순 최씨 집성촌이기 때문에 이날 우리가 찾아가는 곳이 어윤중 생가를 제외한 모든 곳이 회순 최씨와 연관이 있었다.

어윤중 생가도 지금은 최혁재씨 소유로 되어 있으니까 모두 최씨 소유의 것들만 찾아간 셈이 됐다.

선곡1리 즉 선우실 입구에는 외부인의 출입을 제한한다는 표시라도 되는 것처럼 고목들이 즐비하다.

동물들이 자기 영역을 표시해 구축하는 것처럼 입구의 고목은 최씨의 영역임을 알려주는 듯 했다.

고목을 통과하는 까다로운 통과의례를 가볍게 치르고 들어가 1차적으로 찾아간 금화사원은 금적산에 연접해 있었다.

■ 금화사 노후되고 계당은 복원 중
상현서원, 고봉정사 등 학문을 강하는 이같은 곳이 지금 보면 모두 도로변 등 찾기 쉬운 가시권역 안에 있는 것과는 달리 금화서원은 도로변에 금화서원 방향을 안내하는 이정표 하나 없는 임도를 따라가서 만났다.

임도는 시멘트 콘크리트로 포장이 돼 있었고 길 양쪽에는 벚나무가 식재돼 있었으며 갓길의 잡초도 말끔하게 깎여져 있었다.

이 산 속에 무슨 서원이 있을까 궁금해하는 사이에 나타난 금화서원은 초라하기 이를데 없었다.

단청은 낡아 거의 색깔이 불분명했고 서까래며 서원내 성현들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안 바닥은 흙이 흩어져 있고 제기들이 한쪽에 있었다.

툇마루 아랫쪽 벽면은 떨어져 나온 곳도 있고 금이 간 것도 있는 등 비지정 문화재라도 유서깊은 문화유적에 대한 관의 손길이 필요함이 느껴졌다.

금화서원은 1814년 순조 14년에 계당 최홍림의 후손 최덕진이 지방유림 강재문 외 105인의 찬동을 받아 서원건립을 건의해 1815년에 창건한 것이다.

그리고 최운, 성운, 조식, 성제원, 최홍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위패를 봉안하고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에 일익을 담당해왔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 고종 8년에 훼철되었다가 1917년 지방유림회의 주선으로 복원했다.

정면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사우와 강당, 5칸의 관리사 등이 있었는데 강당은 계당(溪堂)을 말하는 것으로 최홍림이 을사사화 후 은거하며 성리학을 연마하고 유생들을 모아 강학했던 곳이다.

금적산에서 내려오는 시원한 물줄기가 바로 계당 앞에서 폭포가 되어 떨어지는 한여름에도 한기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현재 계당은 최홍림선생이 강학하던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 기와지붕 안채 초가로 복원한 최태하 가옥
중요민속자료 139호인 최태하 가옥은 이 집안이 재정 규모를 알 수 있을 정도로 크다.

넓은 부지에 집을 아우르고 있는 낮은 황토담, 안채주변에 독립가옥으로 돼 있는 곳간을 보니 가을이면 엄청난 량의 벼를 거둬들이는 것이 상상이 됐다.

디딜방아가 설치돼 있고, 부엌 앞쪽에 우물이 있던 자리에는 수도가 자리하고 있지만 초가지붕을 엮어 우물가를 만들었다.

그러나 집의 크기, 방의 갯수 등으로 볼 때 부엌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다는 느낌이 들었다.

밥솥과 국솥 등이 별도로 걸려 있었을 법 한데 솥이 걸려있는 아궁이는 하나이고 군불을 때는 아궁이 하나가 있었으며 물 단지나 쌀 단지, 김치단지로 사용했을 수도 있는 단지가 부뚜막에 묻혀져 있었다.

또 사랑채마당에는 현재 보호수로 지정돼 있는 수백년 나이의 회화나무가 왕성한 수세를 자랑하고 있다.

지금 안채 지붕을 초가로 복원하기 전까지만 해도 최태하 가옥은 사랑채와 안채 모두 기와지붕이었다.

그러다 기와지붕 해체시 그 안에서 초가나 나와 초가로 복원하려다 집 소유주인 최태하씨의 극구 반대로 원상 복구가 안되다가 최태하씨 작고로 2004년 여름부터 초가 지붕으로 복원에 들어가 담장까지 모두 복원, 8월말 준공예정에 있다.

보은군지에 소개돼 있는 최태하 가옥을 보면 안채에 있는 대청 상량대에 숭정기원후오임진(崇禎紀元後五壬辰 : 1892년)에 집이 완성됐다는 기록이 있고 안채와 사랑채가 함께 축조됐고 문간채와 곳간채, 헛간채들은 그 뒤에 따로 건축된 것으로 적고 있다.

넓은 공터를 지나면 3칸의 대문이 나오는데 동남향한 문간채이다. 그 서편에는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는 정면 4칸방에 측면은 앞뒤 퇴가 있는 세칸 통이다. 일자형의 평면으로 대문간 쪽의 첫째 칸은 반 칸의 아궁이가 있는 시설이다.

앞퇴 쪽으로 막아 벽장으로 쓰게 했다. 다음 칸은 사랑방 두 칸이다. 앞뒤에 퇴가 있다 다음은 마루를 깐 방이다. 역시 앞뒤 퇴가 있고 방이나 마찬가지로 띠살 무늬의 사분합을 달았다.

다음 칸은 건넌방이다. 한 칸인데 뒤의 퇴는 생략됐다. 사랑채의 방 앞쪽 벽체에는 머름을 드리고 문얼굴을 세웠는데 키가 작은 두 짝이 덧문이 달려 있다.

죽담은 낮은 편이고 툇마루도 낮게 설비돼 고상식이 마루로는 낮은 편이다. 중부의 평야지대에서는 보기 드문 구조로 보은지방이 산골짜기의 고장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인다.

사랑채의 처마는 홑처마이고 지붕은 기와를 이은 팔작이다. 사랑채 뒤편에는 샛담이 있어 중문 칸채에 이어져 있다. 중문칸채는 단칸 통으로 5칸이며 동향했다.

중문은 그 중앙칸에 있고 중문을 들어서면 넓은 안마당이 나온다. 안채도 중문채와 같은 좌향으로 앉았으며 일자형 평면이다.

정면은 6칸이고 측면은 앞뒤 퇴가 있는 구조이다. 높지않은 죽담에 안채가 올라앉아 있는데 기간살이가 아주 넓직하다.

안채의 왼쪽(남쪽)은 첫 칸이 부엌이다. 부엌에 이어 방 두 칸이 계속된다. 방 앞에는 앞 툇마루가 있고 방 뒤의 퇴에는 골방이 시설돼 있다.

방 다음은 두 칸의 대청이다. 앞 퇴는 역시 우물마루이고 뒤 퇴도 마루인데 그 중의 한 칸에 정실을 만들어 조상의 위패를 모시게 했다.

다음 칸은 두 퇴까지를 포함한 칸 반의 건넌방이다. 앞 퇴의 마루는 일단이 높아져 있는데 이것은 가마솥을 건 아궁이의 시설 대문이다.

방과 대청의 앞쪽 벽에는 사분합 또는 분합의 문짝이 달려 있다. 이 덧문을 열면 용자(用字)와 아자(亞字) 무늬의 미닫이가 달려있다.

가구(家構)는 고주를 앞뒤에 세운 이고주(二高柱)의 오량이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기와 이은 팔작지붕으로 구조되어 있다. 헛간 채와 곳간 채는 2칸과 3칸 규모이다.

■ 완전 기울어진 어윤중 생가 복원 중
혁신에 가까울 정도로 개화파였던 어윤중의 생가는 그뒤 최씨 소유로 넘어간 후 방치돼 지금은 30도 이상 기울어진 상태다.

보은군은 어윤중 생가의 현재 소유주로 돼 있는 최혁재 가옥을 충북도 지정 민속자료 38호로 지정해 완전 해체한 후 기단부터 다시 복원한다는 계획이다.

현재 설계 중에 있는데 설계가 나오는 대로 입찰을 실시해 내년 8월 경 완공한다는 방침이다. 장마철 완전히 부서지는 피해를 막기 위해 비닐포장을 덮어놓은 상태다.

어윤중은 1868년 전시 자격시험인 칠석제에 장원급제해 이듬해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승정원주서로 임명돼 관리생활을 시작했다.

1877년 전라우도 암행어사로 임명돼 만 9개월간 전라도 일대를 샅샅이 다니면서 지방행정을 정밀하게 조사해 탐관오리들을 징벌하고 파격적인 개혁안을 내놓아 국왕과 대신들을 놀라게 했다.

그가 정계의 주요인물로 등장해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1881년 일본 신사유람단이 한 사람으로 박정양, 홍영식 등과 함께 파견돼 재정, 경제부분을 담당했다.

또 청나라에 파견돼 중국을 시찰한 견문을 토대로 조선의 개화정책을 위한 그의 의견을 개진해 초기 개화정책을 추진하는데 큰 작용을 했다.

서북경략사로 임명돼 중강무역장정, 회령통상장정을 협정했으며 도문강과 두만강의 국경지대를 조사한 공로로 서북경락사와 함께 처음에는 병조참판, 후에는 호조참판을 겸임했을 정도로 1883년 그의 활동이 눈부셨다.

그러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일어났고 명성황후 정부 때 중용되지 않다가 1893년에 동학교도들이 외속리면 장내리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교조신원과 척왜양창의를 천명해 호서와 호남 지방이 동요하게 되자 양호순무사로 임명 파견돼 집회를 해산시키기도 했다.

당시 관료들이 모두 동학교도들을 탄압만 하는 분위기에서 그는 동학교도들을 민당이라고 했을 만큼 우호적이었으며 동학교도들로 부터 지지를 받았다.

그후 1894년 갑오경장 내각이 수립되자 탁지부대신이 되어 재정 경제부분의 개혁을 단행했고 조세법정주의에 의거한 조세제도 개혁으로 농민층의 부담을 크게 경감시켜 국민들로 부터 상당한 지지와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1896년 2월 아관파천에 의해 내각이 붕괴되자 대부분의 각료들이 국외로 망명한 것과는 달리 그는 농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고향으로 피신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생각으로 선곡리로 피신하다 용인에서 피습됐다.

그의 화려한 족적을 머리 속으로 기억해내며 바라본 생가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뒤늦게라도 도 민속자료로 지정해 복원하려는 계획에 그나마 안도감을 가지며 7월의 문화기행을 마감했다.

<7월의 문화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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