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 - 외상과 수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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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수필 - 외상과 수금
  • 보은신문
  • 승인 2005.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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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눈반 비반 섞여서 내리는 겨울, 경남 함양에 있었다. 비옷장사가 수금을 하기위해 애마를 타고 근 500리 길을 집 떠나온 터였다.
저녁 5시쯤 깊은 골짜기 안에 있는 동네를 들어서 마을 가게방에서 사람을 찾으니 동네 어른들이 전부 관광을 갔다는게 아닌가? 하는 수 없었다.
두어 시간 더 기다렸다가 만나고 오는 수밖에.
질척한 눈을 피해 가게 안으로 들어서고 방으로 들어오라는 인심 좋게 보이는 청년의 말을 마다 않고 옷 정리를 한 다음에 들어가 방에 앉는다.
농한기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투전판을 벌이고 있다.

우비장사는 잡기를 무척 좋아했다.
“ 한번 해 보실라우?.” 얼마나 반가운 유혹인가...
몰입, 시간가는 줄 모른다.
여행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 왔건만 수금도 금방 친해진 고리꾼이 대신 받아서 챙겨준다.
꼬박 밤을 새운 비옷장사, 동이 튼 지가 한참일 때서야 겨울비 내리는 산청가는 길을 나선다.
후회가 막급이다.
오늘 간다고 약속하는 엽서는 띄어 놓은 상황이니 지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균형을 절대 필요로 하는 오토바이를 타고 졸음 운전하는 것도 이놈이 세계 최초일지도 모른다고 투덜대며 큰길에서 20리쯤 들어간 동네에 지난 수금일에 한집 놓치고 온 집을 찾아 회전을 한다.
쏟아지는 잠, 문득 문득 꺾어대는 핸들, 보안창을 열고 겨울비로 오는 졸음을 쫓아보지만 속수무책이다.
비오는 겨울날은 어디 기대고 잘 만한 곳은 없었다.
몇 번의 위험한 순간을 넘기고 가까스로 수금 할 집에 도착 한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 “계십니까?!!” 주인을 부른다.
창호지 바른 방문이 열리고 게을러 보이고 요령 많게 생긴 사내가 “뭡니까?!” 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우비값 수금하러 왔습니다.”
그냥 서 있어도 눈이 감기는 엄청난 졸음에 휘청거리며 간신히 말을 했다.
“허허!. 지금 돈이 없는데 다음에 와야겠는걸.”
500리를 달려 왔는데 돈 만원을 다음에 받으러 오라니...
그건 뒷전이었다.
죽을 지경인 졸음 때문에 그것부터 해결해야 하는 것이 더 급했다.
떨어지는 처마 물소리가 자장가 소리던가.
여러 겹 끼워 입은 옷을 이불 삼아 마루에 걸터앉아 그대로 벌렁 누워 잠이 들어 버린다.
아마도 그처럼 잠자기를 원했던 기억은 처음 있는 일일 듯하다.
꿀 같은 단잠을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달콤한 잠결을 얼마간 붙들고 있는데 누군가가 깨고 싶지 않은 기가 막힌 잠을 깨트리고 기어코 일어나게 하고야 만다.
집주인 이었다.
밖에 나갔다 온 모양으로 처마 밑에 서 있었다.
주인 하는 말. “돈 여기 있습니다.” 돈을 안 주면 사정없이 눌러앉을 못 말리는 신용회사 직원쯤으로 생각하고 비오는 온 동네를 둘러서 용채를 해 온 듯하다.
비옷장사는 몇 십분 잔 것으로 허기를 면할 수 있었던 듯 돈을 받아들고 다시 안장에 올라타고 다음 길을 재촉한다.
그동안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일대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판매할 때는 그런 일이 별로 없었지만 수금할 때는 사정이 그렇지 못해 많이 다투기도 하고 달래기도 해보고 사정도 해보면서 수금을 해 오던 중이었는데 이번과 같이 뜻밖으로 일이 풀리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인지라 실소를 참을 수가 없어 씁쓰라이 웃어 본다.
우비장사는 오늘처럼 나쁜 인연을 만나는 비옷장사를 내년부터는 하지않으리라 다짐한다.
외상이란 본디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호의적인 면을 계속해서 지속하기는 여러가지로 어려운 면이 많다고 생각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건축자재상 본업으로 돌아와 장사를 했다.
시골이다.
다 아는 사람 안면이 통하는 좁은 바닥, 외상이 태반이다.
명절로, 연말로 계산들을 해 주지만 끝내 못 받는 물건 값이 꼭 생긴다.
따져보면 외상값 잘 주는 신용 좋은 사람에게서 벌어다 심이 흐린 사람을 결과적으로 도와주고 있는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는 사람이 무섭다.
모르는 사람은 더 무섭다.
무조건 믿는 편이 더 남자답다는 젊은 날의 큰소리는 요즘에는 아무소용이 없는 듯하다.
모든게 두렵고 무서워지는 이 기묘한 자괴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건강의 악신호인가.
나이가 드는 징조인가.
누군가에게 외상으로 빌려서 사는 인생 그 상환일이 다가오는 것 같아 서글픈 마음이 쳐들어온다.
언젠가 그에게 인생을 수금하러 오는 자가 있다면 순순히 내어 놓지만은 않으리라.....

정 구 필(영진사 대표, BBS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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