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속리면 하개리
상태바
외속리면 하개리
  • 송진선
  • 승인 2005.06.24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연 역행해 수해 두 번 겪고 제자리 찾은 개안 마을
새로쓰는 미을이야기(15) 

우리 지역의 대표적인 고택으로 중요 사적지인 99칸 선씨 대저택이 있는 곳이다. 이 저택 뒤에는 충북도지정 문화재로 작은집인 선병묵·선병우 고가가 있다.

99탄 대저택은 영화촬영 장소로도 많이 이용되고 2000년 10월에는 EBS 주최로 피아니스트 임동창씨가, 피아노 뿐만 아니라 장고와 첼로 등의 악기로 전통과 현대, 양악선율을 국악에 실어 부조화 속의 조화를 이룬 연주회를 가졌던 곳으로 이름나 있다.

이렇게 이름만으로도 유명한 선씨 가옥말로 마을에 또 다른 특징이 뭐가 있을까 궁금해하면서 하개리를 찾아가 주택들의 면면을 살펴보고는 시골 마을로서는 보기 드물게 깨끗하고 잘 정비된 마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구불구불한데다 좁아서 브레이크를 살짝 밟고 핸들을 이리 돌렸다 저리 돌렸다 하며 곡예 운전으로 차량 한대가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골목길’이 아니라 반듯하고 넓었다.

주택 개량이 되지 않아 한 쪽으로 기우는 집이 있는가 하면 비가 새서 비닐 포장으로 지붕을 여기저기 씌우고 페인트가 다 벗겨지도록 지붕을 손보지 않아 슬레이트 지붕에 곰팡이가 슬어 더욱 낡아 보이는 집 등 이런 집들이 많은 다른 시골 마을과 달랐다.

들에서 일을 하다 말고 와서 취재에 응한 주현호 이장에게 정비된 마을의 모습을 보면 가구당 소득 면에서 다른 마을보다 부유해 보인다고 운을 뗐다.

하지만 주현호 이장 왈 “80년대 수해를 당하고 새로 마을을 정비해 마을 전체가 정돈돼 보이기 때문이지 다른 마을에 비해 소득이 높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생각해보니 외속리면 하개 마을은 98년에도 엄청난 수해를 당했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80, 98년 수해 모두 겪어
주현호 이장으로부터 왜 수해를 두 번이나 겪었는지 듣고 보니 여기에는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며 인간이 만든 불행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름 아닌 현재 하천으로 변해 물이 흐르는 마을 앞개울 때문이었다.

사연인 즉은 70년대 식량증산의 일환으로 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을 메워 논으로 바꿨다.
쌀이 모자라던 시대에서 논은 중요했고 그 곳에서 주민들은 통일벼로 대별되는 녹색혁명을 이뤘다.

쌀 한줌이면 보리는 한 되를 섞어서 밥을 하면 그 중에 쌀밥만 골라 퍼서 할아버지, 할머니 상에 올리고 나머지 식구들은 입으로 불면 훌훌 날아가는 까만 보리밥으로 주린 배를 채웠던 시절이다.

쌀밥은 논 몇 천 평이 넘는 집 아니고는 대가족이었던 당시 식구들 모두 쌀밥으로 입에 풀칠을 할 수 없었던 보릿고개 시절이었다.

그럴 때이니 쌀이 그만큼 중요했고 하개리 주민들은 그나마 하천을 메워 만든 바로 그곳에서 밥상 위에 하얀 쌀밥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모두 군에 사용료를 내는 소작이었지만 개인에 의한 소작보다는 가격이 저렴했기 때문에 그 곳을 부치는 사람들은 그래도 곳간에 벼 가마를 채워놓을 수 있었다.
그만큼 하천부지는 하개마을 사람들에게 최소한 배곯는 것은 면케 해준 것이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80년 보은군이 하늘의 버림을 받던 날 하개마을은 물바다가 되어버렸고 하천을 메워 논으로 만들었던 그야말로 문전옥답도 수마가 할퀴고 지나갔다.

삼가천이 앞뒤를 휘돌아 감으며 나갔던 선씨 고택도 수마에 손을 쓸 수가 없었고 문화재도 만신창이가 됐다.

대형 홍수였던 것이다. 인간의 의지대로 할 수도 없었고 성난 자연은 메워놓았던 하천에 다시 예전의 물길을 만들어 놓았다. 예전의 길을 찾아 흐르는 물줄기가 참 신기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물길을 막고 다시 논으로 만들었다.
수해가 매년 나는 것도 아니고 물길에게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제방을 더욱 튼튼하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18년 간 별다른 수해 없이 주민들은 그 곳을 경작했다.

그러나 98년 보은은 다시 물난리를 만났고 어김없이 논이었던 그곳이 터졌다.
결국 자연을 거스르면 안된다는 것을 두 번의 수해를 겪고 나서 깨달은 주민들은 하천으로 복구해달라는 외속리면 내 주민들의 연대서명을 받아 논으로 복구하는 대신 예전대로 물길을 냈다.

70년대까지 옹기생산 성업
여느 농촌마을과 마찬가지로 고령인구가 많아 농업생산에 참여하는 가구 수는 전체 37가구 중 20호에 불과하다. 나머지 17호는 비농가이다.

인구수는 108명인 하개리는 주현호(44) 이장, 선병익(68) 노인회장, 박광희(35) 새마을지도자, 윤순옥(56) 부녀회장이 마을 주민들과 화합하며 인정 많고 살기 좋은 마을을 가꾸는데 일익하고 있다.

하개 마을의 구역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어디까지로 알고 있을까. 궁금하다.
기자도 사실은 하개 마을을 삼가천 안쪽, 그러니까 남쪽으로는 선씨 고택, 동쪽으로는 마을 동산까지로만 알고 있었는데 착오였다.

남쪽으로는 국도 25호선을 경계로 하고 서원계곡 쪽으로 나있는 지방도를 경계로 하니까 상당히 넓었다. 농협 외속지점과 외속 파출소의 주소도 하개리이다.

하개리는 개안마을과 점말을 통합해 1914년 하개리라 불리었다.
개안은 지금의 우리가 보는 하개리이고 점말은 개안마을에서 넘어가는 등고개 너머에 있던 마을로 옹기점이 있어 생긴 이름이지만 지금은 폐허가 된 곳이다.

개안은 삼가천이 이 지점에 이르러 양 갈래로 분류돼 흐르고 장안 밑에서 갈아졌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점말에 있었던 옹기점은 70년대까지만 해도 옹기 그릇을 제조했다. 규모도 컸으며 질이 우수해 점말 옹기는 명품으로 대접을 받았고 만들어 놓기가 무섭게 팔려 옹기점은 70년대까지만 해도 성업이었다.

지금은 서울로 이사한 이원복씨가 그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아 2대를 이어왔던 가업이었다.

하지만 잘 깨지던 옹기그릇을 대신하는 양은그릇이 나오면서 옹기 그릇은 사양길로 접어들었고 플라스틱 그릇이 생산되면서 겨우 명맥을 유지했던 점말 옹기가마는 생산을 중단했다.

결국 점말 동네는 옹기점 폐업으로 하나 둘 마을을 떠나면서 지금은 동네 자체가 없어지고 집이 있던 자리는 인삼을 경작하는 등 농지로 바뀌었다.

웰빙문화가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는 지금 옹기 그릇이 다시 식탁 위에 올려지고 있는 것을 생각해볼 때 지금까지 옹기점이 유지됐다면 옹기점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고 보은군의 보물 관광상품이 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컸다.

폐허가 됐지만 사진으로라도 잡으려고 했으나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인삼밭으로 변해버려 아쉬움이 더욱 컸다.

어린이 영농학습장 그린팜 주목
벼농사와 고추농사를 주로 짓고 있는 하개리에 장안리에 살고 있는 이흥식씨 등이 운영하고 있는 어린이 영농학습체험장인 그린팜이 조성돼 있다.

도시 어린이들의 주말 영농체험 학습장으로 농작물 재배과정을 보고 직접 체험해보는 것인데 올해 처음 운영하는 것이지만 서울, 대전 등지에서 많이 참석, 성황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현재는 단순하게 영농체험만 하는 당일 코스로 운영하고 있지만 향후 민박 또는 팬션과 같은 숙박시설까지 갖춰 지역에서 숙박을 하며 체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운영한다는 계획이다.

현재는 일부 농가만 참여하고 있는데 향우 그린팜이 계획한대로 진행할 경우 지역 참여농가가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별다른 소득작목이 없는 하개 마을 주민들은 그린팜의 활성화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이 마을 주민 중 소득 증대를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 주현호 이장은 10여년 전부터 청주에 직거래 매장을 개설하고 소비자들에게 직거래로 판매해 높은 부가가치를 높이고 있다.

주현호 이장은 자신이 생산한 것뿐만 아니라 지역에서 5억원 상당의 추청과 대안 벼를 매입해 청주 소비자들에게 판매하고 있다.

회사 구내 식당 및 일반 가정을 망라, 한 달 40㎏ 포대로 평균 300포대 정도를 판매한다고 한다.  상당한 물량이다.

수입쌀로 인해 앞으로 우리 쌀 시장이 크게 위축되고 있는 추세에서 농민들의 이같은 자구책은 어려운 농촌현실을 꿋꿋하게 극복해나가는 희망으로 보였다.

마을 뒷산의 참나무 벌목 희망
진취적이며 능동적으로 마을을 운영하고 있는 주현호 이장에게 “하수도며, 안길 포장 등 마을도 잘 정비됐겠다, 지붕개량 등 깨끗하게 정돈된 마을인데 숙원사업이 있느냐”고 질문을 했는데 있단다.

바로 70년대 지어 작고 낡은 새마을 창고를 농기계를 보관창고로 신축하는 것과 동네 뒷산에 서식하고 있는 참나무를 벌목하는 것.

특히 참나무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키가 큰데다 동네 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특히 장마철 비가 많이 와 지반이 약해져 있을 때 자칫 나무가 주택 쪽으로 넘어질 것을 가장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산주가 모두 외지에 있고 또 제대로 연락이 안돼 참나무 벌목이 진행되지 않아 산밑 에 있는 주택에 사는 주민들은 매년 장마기가 다가오면 가슴을 졸이며 지내고 있다며 하루 빨리 참나무를 베어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벌써 장마기인데 올 장마에도 맘을 졸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취재하는 내내 사람 지나다니는 모습은 찾기 어려웠지만 대신 흐드러지게 핀 진한 밤꽃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