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비장사
상태바
우비장사
  • 보은신문
  • 승인 2005.06.17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82년 제대 말년 한통의 편지를 받는다.

여고를 졸업하고 아버지와 장사를 같이 하고 있던 동생으로부터 온 편지인데, 아버지가 장사에는 관심이 없고 도박과 낚시에 빠져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라는 내용이었다.
말년 휴가를 나와 보니 빚이 1700만원 정도 있었고 장사도 잘 안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다시 찾아 온 장남에게의 절대 절명의 순간이었다.

친구와 상의하는 중에 자기가 지금 비옷 장사를 하고 있는데 2700∼3000원정도로 공장에서 구입하여 1만원∼1만2000원에 가을까지 외상을 주고 수금을 하는 장사인데 꽤 괜찮다는 설명이다.

오토바이와 우비를 구입해 달라고 부탁하고 귀대하여 얼마 안 있다 제대를 하고 그날부터 장사를 시작했다.

봄부터 모내기가 끝날 때 까지 어디서든 실명확인을 해 보지 않고 그 자리서 비옷을 주고 주소와 이름만 묻고 추곡 매상해서 주기로 하고 겨울까지 외상을 주는 장사였다.

노란 프라스틱 바구니에 30벌 정도의 비옷을 싣고 3일을 다녔으나 한 벌도 팔지를 못했다. 도대체가 입이 떨어지지가 않는 것이었다. 그냥 할일 없는 사람처럼 사람들 주위에 서성일 뿐 ‘우비장삽니다’ 라는 말을 창피하고 쑥스러워서 한마디도 건네지 못 했으니 한 벌도 못 팔 밖에 달리 길이 없었다.

자존심과 자만심을 혼동하는 한심한 처지를 불쌍히 여긴 친구가 하루 같이 따라 다니면서 시범을 보였다.

들녘에서 농부들에게 밥도 얻어먹고 이런 저런 얘기 끝에 우비를 몇 벌 팔고 지장을 받아 낸다. 논에 모내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 속으로 양발을 벗고 첨벙첨벙 들어가 넉살 좋게 모 부터 일단 심어 주고 본 다음에 신기하게도 많은 사람들에게 우비를 안겨주고 공손히 인사를 하고 돌아서 나온다.

순식간에 광주리를 비우는 친구의 마술같은 장사술에 혀를 차고 그것을 거울삼아 비로소 우비 장사라고 본인의 신분을 말할 수 있게 됐고, 판매에 성공하게 됐다.

그 성공은 가을에 모든 빚을 청산하고도 남아 새로운 도약을 향한 기틀을 마련하기에 충분한 성공으로 이어졌다. 그 후 2년, 규모를 키워 5명의 판매원을 두고 전국을 돌며 장사를 했다.

대한민국 안가 본데가 없을 정도로 농촌 산하 구석구석 누볐던 삼년의 세월은 장사길이라기보다는 여행길 이었다는 것이 더 어울릴 정도로 그때 기억이 참 뭉클하고 보석처럼 소중하기만 하다.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산 밑에 조그만 마을도 놓칠세라 팔 때는 빗속을 뚫고, 수금할 때는 폭설과 한파를 헤치며 찾아갔던 추억들은 지금 생각해도 고생하고는 상관없는 크게 즐거웠던 청년 시절로 남아있다.

우선 설정이 좋았다. 길이든 논이든 누군지 확인도 않고 물건을 주는, 일단 사람을 믿어야하는 배짱을 키울 수가 있어서 좋았다. 5만 명의 사람들 중에 불과 몇 사람만을 못 찾고 못 받을 수 있다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시골 사람은 틀림이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순간에 감동이 좋았다.

개화도 벌판 컴컴한 밤 눈보라 치는 속에서 길을 잃고 헤메던 날. 휘몰아치는 육십령에서 없어진 길을 만들고 앞으로 전진 하던 날.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한 사람도 만났었던 젊은 날의 그 우비 장사에서 가장 크게 남은 이익금은 바로, 사람은 믿어서 손해 볼 수도 있고 믿지 못해서 이익이 날 수도 있지만 역으로 그 반대의 상황도 말이 된다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손해와 이익에는 별 차이가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럴지라면 차라리 무조건 믿는 쪽을 선택하고 사는 것이 멋있고 기분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게 된 확신이 가장 큰 소득일 것이다.

사람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모를 땅에다 일일이 심던 20년 전에 가능했던 장사. 말 한마디면 외상을 주고 틀림없이 갚는 인정이 많이 남아있던 그 시절. 물질적으로는 지금보다 풍요롭지 않았던 것이 틀림이 없을 진데 그 옛날이 그립고 새콤하게 느껴지는 것은 내가 나이가 들어서라기보다 지금이 인간관계가 더 각박하기에 하는 소리일 것 만 같아 씁쓸해진다.

나와 고락을 같이 했던 애마 스프린터 125가 보고 싶다.
인간보다 더 믿고 따르던 그 기계가 보고 싶은 이 애상은 아직도 정을 그리워하는 나는 아직도 철부지인가 보다.

정 구 필(영진사 대표, BBS 군지부 회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