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속 사내 에밀레 박물관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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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속 사내 에밀레 박물관을 찾아서
  • 송진선
  • 승인 2005.06.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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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화의 모태 찾기에 일생바친 고 조자용선생의 삶과 얼 살아있어
“한국사람의 멋을 알려면 먼저 한국 도깨비와 호랑이를 사귀어야 하고, 한반도의 신비를 깨달으려면 금강산과 백두산을 찾아야 하고, 동방군자 나라의 믿음을 살피려면 산신령님과 칠성님 곁으로 가야하고, 한국 예술의 극치를 맛보려면 무당과 기생과 막걸리 술맛을 알아야 한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이것은 내가 살아오면서 마음속에 심은 생활의 지표가 되고 말았다.”

내속리면에 살아있는 한국인의 삶과 얼, 멋의 상징이랄 수 있었더 고 조자용 박사의 흔적이다.

매월 가기로 했던 문화기행을 5월에는 어쩔 수 없이 실행하지 못했다.
에밀레 박물관을 관리하는 도깨비 조각가 유재봉씨가 부득이 기행하는 당일 박물관을 비울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돌출된 것.

아쉬움을 뒤로하고 6월로 미뤘는데 이번 문화기행에는 최규인 삼년산향토사연구회장과 최회장의 부인이 함께 했다.

좀 더 많은 주민들이 참석하길 바라며 고지를 하지만 매번 기행에는 2명 아니면 3명이 고작이다. 어쨌든 10시에 내속리면 사내리 에밀레 박물관으로 향했다.

혹시 이번에도 펑크를 내면 어떻게 하나 사전에 유재봉 조각가의 유무를 묻는 통화를 한 탓인지 마중을 나와있었다.

그동안 방문했던 것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컹컹 짖어대던 대문 옆의 큰 개 때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그 개 대신 발발이 개와 외국종 개가 문화기행단 손님을 맞았다.

구조공학 전공한 조자용박사가 민족문화의 모태인 삼신을 찾은 것은
민족문화 연구가인 조자용 박사는 하버드 출신 건축가에서 출발하여 삼신신앙이라는 우리의 모태 신앙을 찾은 특이성이 있다.

1932년 황주 태생으로 해방 후 첫 유학생의 일원으로 미국을 건너가 밴더빌트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하버드 대학원에서 구조공학을 전공했다.

6.25직후 폐허의 조국땅으로 돌아와 재건 건축사업에 참여해 1976년 심장병으로 쓰러질 때까지 미대사관저, YMCA 건물, 부산 구세군 본부 빌딩을 비롯한 뛰어난 건축 작품을 남겼다.

50년대 중반부터 건축 일을 하는 바쁜 와중에도 자기 전공 분야가 무엇이든 자기 민족문화의 바탕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틈틈이 문화유적지를 돌며 자료를 수집하고 등 우리문화의 뿌리찾기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특히 문화답사와 신라 기와 수집, 민화 수집, 무속 연구를 통해 지배계층 문화와 불교문화 중심으로 정리된 기존의 문화관에서 탈피하여 민중들의 삶 속에 뿌리박힌 독창적인 민문화관(民文化觀)을 정리했다.

민문화 연구를 위해 모은 자료와 깨달음을 바탕으로 그는 박물관도 세우고, 책도 저술하고, 민학회를 창설하고, 강연도 하고, 해외 전시에 나서는 등 활발히 활동하면서 동시대 한국인과 세계인들에게 우리 문화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작업에 주력했다.

80년대 초에는 속리산에 낙향해 삼신사를 세우고 민족문화수련장을 운영하면서 캠프 참가자들, 어린이들에게 한국인의 얼을 일깨우는 일에 신명을 다했으며 말년에는 민족신앙인 삼신신앙을 정리하는 데 열정을 바치다가 2000년 1월 30일 75세로 타계했다.

특히 조자용박사는 ‘민족문화의 참된 모태는 무엇인가’를 화두로 삼아 평생 우리의 민문화(民文化)를 찾아 수집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삼신신앙이라는 우리 민족의 모태 신앙을 정의하고 삼신신앙에서 나온 민족문화를 도깨비, 호랑이, 용, 거북, 봉황 5가지 상징요소로 보는 독특한 민문화관(民文化觀)을 선보인다.

남들이 버리기 바빴던 민화와 삼신 신앙에 주목
그동안 우리 문화에 일찍 눈을 떠서 남들은 버리기에 바빴던 민화나 삼신신앙에 주목하여 부지런히 자료를 모으고 공부하면서 그에 대한 깊은 애정과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는데 그것이 내속리면 사내리 정이품송 앞에 앉아있는 에밀레 박물관, 삼신사캠프이다.

이곳을 들어와 보면 오늘날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문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줄 것이다.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 중 현대무용가인 홍신자씨는 남의 것을 얼치기로 흉내내서 세계인을 감동시킬 수 없다. 나의 것, 우리 문화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 시대 조자용 선생과 같은 우리 문화의 버팀목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은 한국인에게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고 극찬했다.

또 주강현 우리민속문화연구소장은 조자용 선생의 우리문화 외길은 실천의 길을 걷다가 거목이 사라진 곳에는 흔적 또한 크다. 선생은 우리문화의 '느티나무'였다고 생각한다. 느티나무는 겨울에는 당산목으로서 신앙의 구심점이며, 여름에는 쉼터로서 여름밤을 밝히는 이야기마당이었다.
선생의 삶은 그 느티나무와 비슷하지 않을까. 선생이 남긴 짙푸른 그늘의 의미를 새삼 생각해본다.

이시형 신경정신과 의사는 삼신사 수련 캠프에서 인절미, 손두부를 우리 손으로 만들어 먹고 농악 신명풀이를 한마당 펼친 것은 우리 병원의 젊은 직원들에게는 처음으로 해보는 신비로운 체험이라 두고두고 이야깃거리로 삼았다.  한국의 얼, 한국의 핏줄,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태어나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일깨워준, 참으로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고 호평하는 등 한국 얼의 주춧돌로 그를 추앙하고 있다.

우리 일행을 맞은 유재봉 조각가로부터 고 조자용박사에 대한 일화를 들으면서 한도 끝도 없이 들어도 다 못들을 것 같았다.

손볼 곳 많은 캠프장
2000년 조자용박사가 타계한 후 그의 후계자 아니 아들이나 다름없는 유재봉조각가 관리하고 있는 에밀레 박물관 삼신사 캠프는 박물관이라기 보다는, 캠프를 할 수 있는 수련원이라기 보다는 폐허나 다름없었다.
정말 정신없이 어지러울 때 하는 말인 도깨비가 나올 것 같은 그런 집이었다.

옛날 초가, 굴피 등 다양한 재료로 지붕을 얹었던 것이 낡아 지붕의 속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가 하면 얼기설기 판자로 이엉을 해 얹은 것도 있었다.

유재봉 조각가는 이에대한 나름의 이유를 자기에게 쓸모가 없으면 모두가 쓰레기라고 버리는 세상이어서 그것으로 환경이 얼마나 파괴되느냐며 환경도 보호할 겸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버린 자재를 활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90년대 삼신사 캠프는 초등학생에서 부터 대학생, 농촌 주부도, 도시 주부도, 회사원도, 저명한 대학교수도 파란 눈을 가진 외국인도 찾아와 우리 토속문화를 익히고 또 잃어가고 있는 원형 우리의 전통을 배우고 다졌다.

도깨비 탈을 쓰고 풍물을 치고, 옛날방식의 기계로 함흥 냉면 면발도 만들어 보고, 인절미를 만들기 위해 떡메도 치며 그 어느 잔치보다 흥겨운 잔치마당을 펼쳤다.

외국인도 우리문화에 흠뻑 빠져 땀을 흥건하게 흘리면서도 재미있어 했다. 한바탕 질펀하게 놀음판이 펼치다가도 곳곳에 산재해 있는 장승, 삼신당, 북두칠성, 돌탑 등 우리 것들을 보며 우리 고유의 민문화를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던 곳이다.

박물관에는 소장 자료가 없다
고 조자용박사가 에밀레 박물관을 짓고 이곳에 우리의 민문화를 정립하며 수집한 각종 귀중한 자료를 더이상 내속리면 사내리 에밀레 박물관에서는 관람할 수가 없다.
각종 전시회를 하며 만든 도록과 조자용박사가 지은 저술에서만 만날 수 있다. 각종 민화와 기와, 한국, 일본, 중국의 도깨비 문양 등이 자리했던 그 자리에는 고 조자용박사의 흔적만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정말 아쉬운 대목이다.

다만 도깨비 조각가 유재봉씨가 제작한 도깨비들의 천지, 신바람 나는 도깨비들, 도깨비 상을 하고 있는 장승 등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과천 서울 대공원 등에서 전시했던 도깨비 그림과 문화학교에 참여한 학생들이 만든 도깨비 문양, 솟대 등이 대신 그곳을 채워가고 있었다.

그래도 그곳은 여전히 처음 대목리에 둥지를 틀고 정이품송 앞 지금의 속리산 사무소 자리에 있던 박물관을 시작으로 정이품송 주변을 박물관 타운으로 탈바꿈시키겠다는 꿈을 가지고 첫 스텝을 밟았던 고 조자용박사의 숨결이, 손때가 지금도 곳곳에 묻어 있다.

유재봉 조각가는 이제 곧 도깨비 세상이 올 것이라며 식탁에 그려놓고 타계했던 그 유지를 받들어 도깨비는 귀신이 아닌 우리 민족의 얼이라며 도시에 있던 땅까지 팔아서 쏟아부어도 표나지 않는 이곳에 투자, 도깨비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

허물어지고 박물관에 소장자료는 없지만 곳곳에 도깨비가 살아있고 삼신이 깃들어 있는 유일무이의 한 우리민족의 모태로 그 상징으로 살아있음에 기뻐했다.

그리고 조자용 박사가 이루고자 했던 유지를 이제는 우리들이 이어가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게 됐다.

<우리고장 문화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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