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암 구수복 선생(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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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암 구수복 선생(11)
  • 보은신문
  • 승인 2005.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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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영원(永遠)한 안식(安息)

중종 28년(1533) 4월에 구례현감(求禮縣監)에 부임한 구수복은 중종 30년(1535) 9월 26일. 재임 중 관사(官舍)에서 별세하여, 12월 28일에 관기 동리 뒤의 원앙골 묘좌지원(卯坐之原)에 안장되었다. 구수복이 생존 시(生存 時)에 온갖 고난을 다 겪고 김태암의 호의로 관기에 정착하여 비록 농촌생활이지만 자연과 더불어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찾아, 단장 들고 짚신차림으로 명산승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마음껏 탐승했는데, 특히 속리산의 경치를 가장 좋아하여 수풀과 샘 사이에서 시를 읊조리며 즐기어 집에 돌아갈 줄을 몰랐었다. 처음 아들을 낳고 후학도 양성하면서 관직에 복직된 생애의 결실 처인 속리산의 정기가 서린 이곳 관기를 영원한 안식처로 삼아서, 그의 강직한 의기를 이어받고 태어나 거족으로 번성하는 관기 세거 후손들의 삶을 지켜보게 된 것이다. 정조 23년(1799) 5월 26일. 보은 유학(幼學) 이덕무(李德懋) 등이 구수복과 구수담 형제의 증작(贈爵)과 증시(贈諡)를 상소하여 6월 6일에 병암 구수복은 부제학에, 아우 폄재 구수담은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영조 13년(1737). 마로면 기대리에 병산서원(屛山書院)을 창건해서, 상촌 김자수(桑村 金自粹). 병암 구수복(屛菴 具壽福). 원정 최수성(猿亭 崔壽성)을 제향 하다가, 순조 2년(1802)에 구병산 아래로 옮겨지은 후에,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를 동향했으나, 고종 8년(1871)에 병산서원은 훼철되었다.  서기 1982년 3월 20일에 중건 개축한 고봉정사(一名 三賢亭. 孤峯精舍懸板은 尤菴 宋時烈의 親筆) 건물 바로 옆에 고봉사(孤峯祠. 懸板은 前大統領 崔圭夏 親筆)를 창건해서 원정 최수성(猿亭 崔壽?). 충암 김정. 병암 구수복(屛菴 具壽福) 3현의 위패를 봉안 제향하고 있다. 구수복의 묘지(墓誌)는 정수 유인숙이 찬술하고, 묘표(墓表)는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이 찬술(撰述)했다.

8. 병암에 대한 인물평(人物 評)
 병암 구수복에 대해서 여러 선현(先賢)들이 객관적으로 평한 인물론은 다음과 같다.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는 평하기를, “질박(質朴)하고 정직(正直)하며 평이(平易)와 험난(險難)이 일치(一致)되었다” 하고, 충암 김정(沖菴 金淨)은, “외모(外貌)는 완만(緩慢)하나 내성(內性)이 강엄(剛嚴)하다” 하고, 송재 한충(松齋 韓忠)은, “법도(法度)를 고수(固守)하면서 진실(眞實)과 친절(親切)이 요약(要約)되었다” 하였으며, 후일(後日)에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은 명문(銘文)에 찬술(撰述)하기를, “어려서부터 학문(學問)에 열중(熱中)하고 취향(趣向)이 심(甚)히 방정(方正)하여 제현(諸賢)들의 추앙(推仰)을 받았다” 하였고, 당적보(黨籍補)에는, “성질(性質)이 화려(華麗)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담박(淡泊)한 것을 좋아했으며 후진(後進)들을 많이 가르쳐 성취(成就)시켰다” 고 기록되었고, 기묘록 보유(己卯錄 補遺)에는, “성품(性品)은 분잡(紛雜)하거나 화려(華麗)함을 즐기지 않고 오직 담백(淡白)한 것을 좋아했다.
 평상시(平常時)에는 온화(溫和)한 말과 유순(柔順)한 낯빛으로 남에게 거 스리지 않으나 일을 당하면 문득 대항(對抗)하는 낯빛과 준엄(峻嚴)한 말로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므로 남에게 경복(敬服)하는 바가 되었다. 또 후학(後學)을 힘껏 권하여서 성취(成就)한 자가 많았다”고 하였다.

9. 보은(報恩)에 연고(緣故)
 관기에서 능성구씨가 480년 세거하며 많은 문과 급제자를 배출해서 보은을 빛내는데 공헌한 기원은 구수복으로 부터 이지만, 그의 사후에 근원을 이룬 원천은 부인과 두 아들 및 현손들의 공덕이 크다. 부인은 태종대왕의 증손녀인 전주이씨로 권세 있고 부유한 종실(宗室)의 따님이지만, 강직했던 부군을 따라 낙향해서 평생을 고생하면서 살았으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성품이 정숙(貞淑)하고 민철(敏哲)하며 부군(夫君) 집상 중(執喪 中) 애도(哀悼)함이 심하여 비록 야간이나 상복(喪服)을 벗지 않고 몸치장(治粧)하는 일이 없으므로 소문이 조정에 알려져서 중종 32년(1537)에 열녀(烈女)로 정려(旌閭)되었다.  정문(旌門)은 지금 관기 1리에 보전되고 있다. 장남 구빈(具斌 1527-1597)은 명종 10년(1555) 식년 사마 양시에 합격하고 평생 고향을 지키고 살다가 정유재란(1597)에 왜적(倭賊)에게 우해(遇害) 당했는데, 명종 5년(1550)에 낳은 무남독녀 구계영(具桂英)은 좌상 송당(松塘) 유홍(兪泓)의 아들 유대건(兪大建; 文科 大司諫)에게 출가해서 1남 1녀를 낳아, 그 자손이 임한리에서 기계유씨(杞溪兪氏)의 집성촌을 이루어 세거하고 있다. 차남 구변(1529-1578)은 백부 구수연이 서울로 데려가서 후사(後嗣)를 삼았는데, 명종 7년(1552) 진사 합격하고 명종 13년(1558) 문과에 급제해서 춘추관기사관과 진주목사 등 내외의 여러 관직을 거쳐 봉상시정(奉常寺正)을 지냈다. 진주목사 때에는 덕천서원을 창건하고 선조 9년(1576) 가을에 일시 고향인 관기에 와서 아버지가 생시에 도학을 강론하던 고봉의 정상에 있는 모정(茅亭)터에 풍우를 피할만한 작은 정사(亭舍)를 지어 형님인 구빈에게 맡기고 서울로 돌아갔다. 구변의 맏아들 구광원(1546-1590)은 선조 9년(1576) 생원 합격하고 예빈시 봉사를 지냈으며, 작은아들 구곤원(1550-1608)은 선조 3년(1570) 진사 합격해서 군수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훈되었는데 그의 후손들은 경기도 도마교(현 시흥시)에서 세거하고 있다. 구광원의 아들은 구재(1566-?)와 구계(1568-1629). 구섭(1570-1619). 3형제인데, 구재는 임진왜란 때에 관기에서 떠나버리고 구계는 서울에 살면서 김장생의 문인으로 양근군수를 지냈는데 중년에 일시 관기에서 살았으며 인조조의 명신인 아들 구봉서의 귀현으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구섭은 충무위 행부사과를 지낸 증좌승지인데 관기에 살았으나 자녀가 없어 삼종질인 구봉우를 후사로 삼았다. 시호(諡號)는 경헌(景憲)이고 호(號)가 낙주(洛洲)인 구봉서(具鳳瑞 1596-1644)는 어려서부터 영민(英敏)하여 광해 10년(1618) 생원 합격하고, 인조 2년(1624)에 문과에 급제해서 이조정랑 때인 인조 11년(1618) 우암 송시열이 장원한 계유 식년 사마시의 시관(試官)이었고, 그해 호당에서 사가독서를 하고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거쳐, 전라도관찰사에 이어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인조 18년(1640) 10월에 고조부인 병암 구수복이 도학을 강론하던 고봉의 경내에 “능성구씨 낙주가승”의 판각을 만들어 영구히 보전하려고 석조 “능성구씨보갑”을 설치했다. 이석함은 뒤에 후손인 필자가 연혁을 고증해서 문화재 지정을 출원하여, 서기 2001년 3월 30일에 충청북도지정 민속자료 제 11호로 문화재 지정을 받았다. 낙주 구봉서는 평안감사 재임 중이던 인조 22년(1644) 1월 30일에 관사에서 과로로 순직함으로써, 이조판서에 추증되어서 인조대왕 특사장으로 안장된 명신인데, 영. 호 양남과 평안도지방에는 감사 재임 시에 선정을 베풀어 열 곳이 넘는 지역에 생사 및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특히 경상도 경주에는 인조 20년(1642) 7월에 ‘관찰사 겸 순찰사 구상공 봉서 청덕인정비’ 를 세우면서 보은인이라고 새긴 비석이 지금도 보전되어 오고 있으며, 인조 19년(1641)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해서 부사를 지낸 만주 홍석기(洪錫箕)를 위시하여 보은출신으로 인조 12년(1634) 별시문과에 급제해서 장령을 지낸 김상과 인조 11년(1633) 진사 합격한 이명홍(李命弘). 그리고 현감을 지낸 막내 사위인 서울의 이집성(李集成) 등 문인(門人)들도 여러 명이 있다.  구섭의 아들(系子) 구봉우(具鳳羽 1612-1681)는 인조 20년(1642) 생원 합격하고 선능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불취(不就)이며, 뒤에 우암 송시열을 반대했던 윤휴가 이조에 있을 때에 내승을 천거했지만 역시 송우암과의 교분에 신의를 지켜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구봉우는 고봉의 정상에 증조부 구변(具변)이 세운 정사 건물이 임진왜란에 병화(兵火)로 회진(灰塵)된 것을 종형인 구봉서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장만해 두었든 자금으로 숙종 4년(1678)에 봉우리 아래의 현 위치로 옮겨서 한와 목조 삼 칸의 팔작 건물로 정사를 개축했다. <구이천이 봉우리 아래로 옮겨지었다는 설(說)은 와전(訛傳)이다.> 그해 가을, 장기(현재의 포항)에 위리안치된 우암 송시열을 찾아가서 만나 위로하고 돌아오는 길에, 기묘명현인 고조부 병암 구수복과 을사명현인 생가 고조부 폄재 구수담의 묘표와 인조조의 명신인 종형 낙주 구봉서의 신도비명과 고봉정사(孤峯精舍)의 현판 글씨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겨울철에 고봉정사 건물에 달았다.
 정암 조광조의 질녀 한양조씨와 병암 구수복의 아우인 구수담 부부의 혈손(血孫)인 구봉우는, 희암 김태암의 증손녀 상산김씨와 병암 구수복의 증손인 구섭 부부의 계자(系子)로서, 충암 김정의 현손녀 경주김씨와 결혼하여 아들 구이천(具爾天 1644-1721)과 구이성(具爾性 1646-1680)을 낳아, 종형인 낙주 구봉서의 후사를 아들 구이성으로 삼았다. 관기출신 구씨는 거의 다 구이천과 구이성의 혈손(血孫)들이다. 기묘사화에 화(禍)를 입은 명현들의 형제와 후손들이 혼인으로 한 가족이 되어, 그 자손들이 수백 년을 세전(世傳)해 오고 있으니 사람의 의(義)로운 인연이란 참으로 고맙고도 기이하다. 직계(直系), 방계(傍系), 사계(斜系)의 조상들로 인해서 모두가 혼맥과 혈연으로 얽히고 <&05949>힌 친인척이 되고 무관한 남남이 아니므로, 현달(顯達)하신 선조들의 위업과 유지를 받들어 대를 이어 물려받은 은혜로운 이 터전 보은을 영원히 빛내어 조상들께 보답하는 일이 우리들이 행할 도리라고 믿는다.
(연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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