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장 인물탐방-병암 구수복 선생(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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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 인물탐방-병암 구수복 선생(10)
  • 보은신문
  • 승인 2005.04.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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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낙향 은거 시절(落鄕 隱居 時節)

구수복은 방면되자 즉시 서울을 떠나 경상도 상주 평온(化南面 坪溫里에 遺墟碑 現存)으로 낙향했다. 은거하면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짓고, 중종 16년(1521) 4월 30일에는 예안이씨(禮安李氏) 이항(李沆)의 비명(碑銘)도 찬술했다. 이렇게 5년을 지내자, 장인인 단산도정 이수(丹山都正 李穗)가 사위를 딱하게 여겨, 보은에 있는 자기 농장에 가서 살도록 했는데, 얼마 후에 농장의 종들이 싫어해서 중상하기를 ‘좌랑이 농막을 차지한 후로 종들을 혹사하여 살아갈 수가 없다’고 하자, 이 말을 들은 장인 이수가 자세히 살피지도 않고 노하여 사위를 쫓아냈다.

이때는 겨울철이었는데 수척한 말 한필과 연약한 종 한사람을 데리고 길에 나와 갈 곳이 없어 방황하였는데 행색이 참으로 비참했다.  때마침 호걸남자가 사냥하러 수많은 종과 매와 사냥개를 몰고 지나갔다가 얼마 안 있어 다시 마주치게 되었는데, 그가 말위에서 읍하고 묻기를 ‘그대는 누구이시기에 길에서 홀로 머뭇거리고 있소?’ 함에, 구수복이 연유를 대략 말하니, 그가 즉시 말에서 내리기를 청하여 눈(雪)위에 털요를 깔고 서로 마주 앉아 담소하면서 꿩을 구워 안주로 술을 권하기를 숙친한 사이같이 하고 그의 집으로 같이 갔다.

그리고 그가 가옥과 전토(田土) 수십 경을 주어, 구수복이 부인과 셋 딸이 함께 편히 살도록 하고 날마다 만나서 즐겁게 지냈다.

이 호걸남자는 충암 김정의 천거로 연원찰방(連原察訪)으로 갔다가 기묘사화로 파직되어서 고향 보은에 돌아와 있던 희암 김태암(希菴 金泰巖 1480-1554)으로 모두 그를 의사(義士)라고 일컬었다.  이때가 중종 21년(1526) 겨울로 능성구씨의 보은 시거(始居)여서 후손들이 관기에 480년을 세거하게 된 기원이다. 각별히 우애가 깊었던 막내 동생 구수팽을 현풍곽씨(郭氏) 참봉 자휴(子休)의 따님과 결혼시켜 분가하게 함으로써 오늘날 능성구씨 봉계(산외면) 문중의 근원이 되어, 지금 관기와 봉계에 능성구씨가 집성촌을 이루어 세거(世居)하게 된 것이다. 구수복은 관기에서 맏아들인 구빈(具斌 1527-1597)과 차남 구변(1529- 1578) 및 막내딸을 낳았고, 수시로 고봉의 모정(茅亭)에서 성리학을 강론하여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열중했다. 구수복이 기묘사화로 낙향하여 김정과 고봉에서 만나 “음풍영월하였다”는 설은 전혀 사실과 다르게 왜곡 와전되었다. 조광조와 김정과 구수복은 기묘년  이전에 이미 조정에서 의기상합하여 함께 활약했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바로 체포된 조광조는 그해 겨울에 능주에서 사사되고, 김정은 유배를 다니다가 2년 후인 중종 16년(1521)에 제주에서 사사되었으며, 구수복은 김정 사후(死後)에 보은 관기에 정착했다. 그러니 김정과 구수복이 기묘사화 후에 고봉에서 만날 수 없었다.

6. 구례현감(求禮縣監)서용(敍用)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등관(登官)한 바로아래 동생 폄재 구수담(폄재 具壽聃)이 검토관으로 경연에서 중종에게 기묘년에 화를 입은 선비들을 구제해야 한다고 아뢰어서 구수복이 외직인 구례현감에 제수되었는데, 구수복은 자신의 수명을 미리 알기라도 한 듯이 유훈(遺訓)을 써 놓고 부임했다.

그 당시 경연에서 있었던 구수담의 계청(啓請) 내용을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보면, 중종 28년(1533) 4월 13일. 조강에서 경연검토관 구수담이 아뢰기를, “옛사람은 형옥(刑獄)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지금 강(講)하신 글에 이른바 ‘대인(大人)을 보는 것이 이(利)로우니 원길(元吉)하다.[利見大人元吉]’ 한 것은 대인의 마음은 지극히 공정하여 일의 시비 경중과 사람의 곡직 사정(曲直 邪正)이 모두 공평한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아서 청단(聽斷)에 잘못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원길(元吉)이라고 한 것입니다. 옛 글에 ‘공경(恭敬)하고 공경하여 오직 형(刑)을 안타깝게 여기라.’ 하였고, 또 이르기를 ‘만일 그 정상을 알았거든 불쌍하게 여기고 기뻐하지 말라.’ 하였으니, 형옥을 다스리는 사이에 흠휼(欽恤)하는 뜻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고의성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형(刑)의 경중도 같지 않습니다.

나라를 해치는 여우나 시랑 같은 무리를 사이(四夷)로 내치는 데는 흠휼 하는 뜻을 둘 수가 없습니다. 기묘년 사류(士類)의 일은 비록 잘못이 없지 않았지만 그 본래의 뜻은 모두 나라를 위해서였지 추호도 사특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죄를 입은 지 15년이 되어, 부모와 형제. 처자를 서로 만나지 못하고 거의 죽어서 없어졌습니다. 머나먼 만리 땅에서 이미 마른풀이 우거진 황량한 무덤에 묻혔는데도 조정에서는 그들의 불쌍한 정상을 아뢰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상(聖上)의 은택이 한 맺힌 백골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이는 큰 흠전(欠典)입니다. 지난번 특별히 소통하고 전리(田里)로 놓아 보내어 돌아가게 하자 사람들이 서로 경하하고 사람들이 모두 쾌하게 여겼습니다.  심지어 길가는 사람들조차 경탄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니, 중종이 이르기를 “화기(和氣)가 손상되어 연달아 재변이 일어났기 때문에 놓아준 것이다. 근래 감생(減省)하는 일이 있으니 독서당도 가을걷이 후까지 임시로 파했다고 한다. 독서당은 지금 형식뿐이어서 비록 옛날 같지는 못하지만, 조종조에서 설립한 뜻은 범연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줄이는 일이 여기에까지 이르니 되겠는가? 또 한두 관원에게 공궤(供饋)하는 비용을 줄이는 것이 국용(國用)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하였다. 대사헌 심언광(沈彦光). 영사 정광필(鄭光弼). 지사 김안로(金安老)가 이어서 아뢰고, 또 영사 정광필이 아뢰기를 “외방 수령으로서 문장에 능한 자는 김안로의 말<혹 문장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자가 있으면 비록 약간의 과실이 있더라도 조정의 관리에 특별히 서용하여 권면하는 것이 옳습니다.>처럼 특별히 포장(褒奬)하여야 합니다.

또 폐기(廢棄)된 사람으로서 유인숙(柳仁淑)과 정순붕(鄭順鵬) 등은 당초에 죄를 입은 자가 아니고 그 후에도 오래 까지 행세하였는데 이항(李沆)이 대사헌이 되자 아뢰어 파직시켰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비록 크게 쓰지는 못하더라도 서울이라면 군직(軍職)을, 외방(外方)이라면 수령을 제수하는 것이 안 될 게 뭐 있겠습니까? 또 구수복도 중한 죄인이 아닙니다. 외관(外官)을 제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중종이 이르기를 “기묘년에 죄를 입은 사람은 경솔하게 흔단을 열어 서용할 수 없다. 다만 종신토록 찬출(竄黜)할 수 없기 때문에 대신이 아뢴 바에 따라 놓아 보낸 것이다. 그 가운데 만약 부득이 서용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서용해도 된다.

그렇지 않으면 급급히 서용할 필요는 없다. 구수복과 그 당시 사관(史官) 한 사람은 함께 다른 잘못으로 죄를 입었는데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하였는데, 영사(領事) 정광필이 “그 사관 한 사람은 바로 이구(李構)입니다. 이구의 일은 구(構)가 향약(鄕約)을 시행한 후에는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고 향생(鄕生)이 망령되게 아뢰었던 것입니다. 다른 일로 죄를 입은 것은 구수복과 본래 구별이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처음 외방의 훈도(訓導)와 교수를 제수하였다가 나중에 전적에 제수하는 것도 무방할 듯합니다. 정순붕(鄭順鵬)등의 일은 상감께서 재단하소서.” 하고, 아뢰었다. 고 하였으며, 야사(野史)인 연려실기술의 중종조고사본말에는, 계사년에 수찬 구수담이 입시하여 당인의 죄 없이 오랫동안 폐하여진 것을 극력으로 논하고 서용하라고 청하여 기묘. 경진. 신사년에 귀양 갔던 사람 및 입거(入居)했던 양민, 천민들을 합하여 60여 호가 일시에 석방되고, 이때 유배되었던 자로 생존하여 풀려온 사람은 오직 김구. 박훈. 최산두등 몇 사람뿐이었고, 그 나머지는 권벌. 구수복. 윤세호. 이사균. 공서린. 김정국. 장옥 등 파직 또는 삭탈되었던 사람은 모두 서용됐다. 고 써 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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