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암 구수복 선생(5) (1491∼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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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암 구수복 선생(5) (1491∼1535)
  • 보은신문
  • 승인 2005.03.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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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신용개의 생각은 본래 위차의 순서에 구애되고 또 정승의 재질로 안당을 깊이 허여 하지 않아서 그가 답한 것은 김전. 이계맹. 남곤을 중하게 여겼다.

윤구가 당시 주서로서 수의하고 돌아왔는데, 안당이 평소에 촉망을 받는다고 믿고는 뜻을 맞춰 변사(變辭)하여 도리어 신용개가 안당을 중히 여긴다고 아뢰었는데, 중종과 신용개는 실상 그런 줄을 몰랐다.

당시 구수복도 주서로서 그날 일을 적으려고 문의초(問議草)를 찾아 쓰려하니, 윤구가 듣지 않고 숨겼다. 그러나 봉교 유희령(柳希齡)이 무슨 일로 신용개의 집에 갔다가 마침 윤구와 함께 그때의 일을 자세히 들었는데 변사하였다는 것을 듣고서는 통분해 하여 그 일을 하번(下番) 검열 심사손에게 부탁하자 심사손은 그 시말을 대강 적어 두었다.

당시 채세영(蔡世英)도 검열이었는데 그 말을 윤구에게 누설하여 윤구는 이 때문에 심사손이 적어 두었다는 것을 알고는 심히 원망하였다. 일찍이 심사손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동료가 그대의 기사(記事)를 황당하다고 하니 그대는 확실히 수상한 사람이다.’ 하여 은연히 꾸짖으면서 기록한 것을 몰래 고치려는 것 같았다.

하루는 둘이서 같이 은대(銀臺)에서 숙직하는데 밤에 중금(中禁)의 가동(歌童)을 불러 술을 마시면서 서로 즐겼다. 심사손이 장난삼아 묻기를 ‘내수 가운데 누가 쓸 만한가?’ 하니, 가동이 답하기를 ‘오직 박영공(朴令公)뿐입니다.’ 하였는데, 대개 명을 전하는 환자(宦者) 박승은(朴承恩)을 가리킨 것이다.

심사손이 묻기를 ‘어찌하여 박영공을 어질다 하는가?’ 하니 답하기를, ‘무슨 일이든 가장 어집니다.’ 하였다. 이때 윤구가 자는 체 하다가 갑자기 일어나 꾸짖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환시(宦侍)를 영공이라 하는가?’ 하니, 심사손이 말하기를 ‘내가 먼저 스스로 칭하여 말한 것이 아니고 가동의 말을 따라 그랬을 뿐이오.’ 하였다.

그 후에 윤구가 다른 사람에게 헐뜯기를 ‘심사손은 박승은에게 아부하느라 입궐할 때면 매양 박영공의 안부를 사알(司謁)에게 묻는다.’ 하여, 이로부터 듣는 자는 심사손을 비루하게 여겼다. 얼마 안 있다가 구수복은 정언(正言)에 제수되고 그 뒤에 윤구가 본직에 제수되었는데 식자들은 윤구가 불행하다 하고 결국 출서(出署)하게 되었으나, 사람들은 대부분 괴이하게 여겼다. 오래 있다가 심사손이 또한 주서에 제수되자, 대사간 박호(朴壕). 정언 권운(權雲) 등이 윤구의 이간질인 줄 모르고 원(院)에서 의논하기를, ‘이 사람은 일찍이 병필(秉筆)하는 자리에도 합당하지 않았는데 지금 또 어찌 주서가 되겠는가?’ 하면서, 서로 월서(越暑)하려 하였다.

심사손이 듣고 곧 윤구가 거짓 헐뜯음을 알고 틈을 만들고 원한을 품어서 스스로 해명하는 데에 급하여 그 경위를 심달원(沈達源)과 그의 친우에게 말하여 해명하였다. 심달원은 즉시 제배(?輩)들에게 전파하여 수일 사이에 사람들은 다시 윤구의 음사하고 교활한 상황을 알고는 심히 미워하기를 마지않았으나 도리어 미안한 점이 많이 있음을 염려하였다.

이제 와서 간원이 탄핵하였는데, 당시 이조좌랑 이충건(李忠楗). 이희민(李希閔)등은 바로 외교수(外敎授)를 제수시키자고 까지 의논하였으나, 어떤 이는 시종에 있는 자를 이렇게 할 수는 없다고 하여 그 의논은 중지되었는데, 지금까지도 정원일기(政院日記)에는 복상(卜相)의 의논은 없었다고 되어 있다고 했다.

2-10) 조정(朝廷)의 기강(紀綱)에 대해 아룀
중종 14년 1월 23일. 임금이 상참(常參)을 받고 조계(朝啓)를 들었는데, 전날(22일)에 문근(文瑾)을 형조참판으로 김정을 부제학 겸 동지성균관사로 삼았던 일로 부제학 김정이 연소하여 배우지 못해서 부제학에 합당하지 않다 하여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석강에 들어가서 동지사 조광조가 아뢰기를, “본부(本府)가 최숙생을 함문(緘問)할 때<趙光祖가 그때 憲長이었다> 위(位)가 숭품(崇品)에 이르고 상은(上恩)이 지중하였다는 등의 말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신(臣)이 밖으로부터 와서 보고는 최숙생을 어찌 그렇게 박하게 대우할까 생각했고 본부 동료 또한 ‘실수였다’ 하니, 아마도 상감(上監)께서 고관대작을 지나치게 견제하시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하니, 중종이 이르기를, “과연 그 말이 공함(公緘)에 있었다. 그러나 특히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함에, 조광조가 아뢰기를 “정국(靖國)하기에 황황하게 바쁜 가운데 조정에서는 식견이 고명하지 못하고 작상(爵賞)이나 공신은 지나치게 남용하여 신(臣)이 근래 대관에 있으면서 한번 나라 일을 돕고자 하였으나, 이(利)의 근원이 한 번 열리자 구제할 대책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생각이 이에 이르러서는 자신을 잊고서 까지 말하였으나 신(臣)은 지식이 천단하여 할 수 없었습니다. 평상시라면 그만이겠으나 만약 변고라도 있으면 비록 훌륭한 자가 있더라도 잘 처리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성학(聖學)이 고명하시니 어찌 이것을 생각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이 폐단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사직(社稷)이 지탱할 수가 없으니 우리나라의 이 일은 큰 종기를 앓는 것과 같아서 마땅히 밤낮으로 헤아려 이(利)의 근원을 깨끗이 씻어 버려야 합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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