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장 인물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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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 인물탐방
  • 보은신문
  • 승인 2005.03.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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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암 구수복 선생(4) (1491∼1535)
2-8) 선제(宣制)의 가용(可用)을 아룀
중종 14년(1519) 1월 4일. 조강에서 시강관 박세희가 아뢰기를, “옛날 정승을 임명할 때에는 반드시 선제(宣制)로서 그의 맡은바 일을 말하였는데, 지금은 단지 감사에게만 교서가 있습니다. 경상(卿相)의 임무는 지중하니, 마땅히 선마(宣麻)로서 직에 부지런 하라는 뜻을 유시하소서.” 하고, 지사 김안국(金安國)이 아뢰기를, “선제하는 일은 하(夏), 은(殷), 주(周) 삼대(三代) 이래 대대로 모두 그랬으며, 전조(前朝) 고려 때에도 있었는데, 우리 조정에서는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비록 문구(文具; 文飾)에 가깝지만 대신의 책임은 크고 임무는 무거우니 벼슬을 명함에 임금께서 위임한다는 뜻으로 선칙(宣勅)한다면 아랫사람 또한 감격하여 받을 것입니다. 비록 일일이 할 수는 없더라도 삼공(三公)에게는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합니다.” 하고, 시강관 박세희 또 아뢰기를, “삼공을 그렇게 한다면 이판은 사람 쓰는 것을 관장하는지라 더욱 근본이 되니, 이 또한 그렇게 해야 됩니다.” 하였다.

헌납 정옥형(丁玉亨). 장령 문관(文瓘). 참찬관 공서린(孔瑞麟). 검토관 구수복도 선제(宣制)를 쓰는 것이 옳다(以爲可用 宣制)고 하였다.

중종이 이르기를, “과연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근래 하지 않던 것이니, 마땅히 대신과 의논하여 처리해야 한다.” 하였다.

영사 정광필은 아뢰기를, “요즘 조정에는 실정(失政)이 없는데도 기구(耆舊)의 신료가 벼슬에 나가는 것을 즐겨하지 않아, 대부분 병을 칭탁하여 벼슬하지 않고 전리(田里)에 물러날 계책만을 하니,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중종이 이르기를, “청렴하게 물러나고자 하는 절의 또한 가상하니 물러나는 자를 책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2-9) 중종 13년 5월 7일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중종 14년 1월 8일의 일기 내용 이해를 위해, 먼저 중종 13년 5월 7일자 안당을 우의정으로 뽑을 때의 복잡한 사정이 적힌 ‘정원일기’<이 기록이 윤구의 옥사와 연관되어 중종 15년 3월에 구수복을 파직 하옥시키는 빌미로 이용되었다>를 살펴보면, 영상 정광필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전에 아뢴 김전(金詮). 이계맹(李繼孟). 남곤(南袞). 안당(安당) 네 사람 중에서 상감(上監)께서 참작하소서.” 했다.

이때에 좌상 신용개가 병으로 집에 있었으므로 주서 윤구(尹衢)를 보내서 물어보게 하였는데 윤구가 신용개의 말로서 아뢰기를 “신하를 아는 것은 임금만 한 사람이 없으니 상감께서 스스로 결정하소서. 신(臣)등이 지난번에 의계(議啓)한 세 사람 중에서 참작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전번에 상감께서 안당을 정승으로 삼을만하다 하셨을 때, 신(臣)등이 분부를 받들지 못한 것은 그때에는 직질(職秩)이 아직 좀 낮기 때문이었습니다만 지금은 올라서 1품(一品)이 되었으니, 이 네 사람 중에서 고르소서. 그러나 취하고 버리는 것은 오직 상감에게 달렸을 뿐입니다.” 했다.

윤구가 수의(收議)할 때에 한림 유희령(柳希齡)이 주청에 관한 일을 수의하기 위하여 또 좌상의 집에 갔다가 이 일을 함께 들었는데 좌상이 이르기를, ‘신하를 아는 것은 임금만 한 사람이 없으니 상감께서 스스로 결정하소서. 그러나 신(臣)의 뜻은 지난번에 아뢴 세 사람 중에서 정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그때에 상감께서는 안당을 정승으로 삼을만하다고 분부하셨지만, 신(臣)의 뜻은 전번에 아뢴 세 사람 중에서 정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했다 한다.

그러니 신용개의 뜻은 안당에게 비중을 둔 것이 아니라 세 사람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윤구가 임금에게 아뢰려고 할 때에 승지 이자와 김정이 촉망한 사람을 물으면서 좌상도 반드시 안당에게 비중을 두었겠지? 함으로, 윤구는 한참동안 주저하다끝내 사실 데로 대답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좌상의 본뜻과 윤구가 아뢴 결과는 차이가 생기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중종은 신용개가 안당에게 비중을 두고 있지 않은 것을 도무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을 아뢰고 나서 윤구가 한림 심사손(沈思遜)에게 말하기를, 내가 아뢴 것이 좌상의 말과 다르게 된 것은 승지가 먼저 묻기를 ‘좌상도 안당에게 비중을 두었겠지? 하기에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이다. 자네가 역사에 기록할 때는 이 뜻을 알고서 기록해 달라’ 했다.

윤구가 왕명을 전하여 정승을 고르는 중대한 일을 수의하면서 그 말을 신용개 앞에서 기록하지 않고 이리 저리 물어 가지고 와서 아뢰었으니 그것이 잘못임을 알 수 있고 말을 변개하여 회계(回啓)한데 대하여서는 임금이 비록 본래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고 또 여러 사람의 뜻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 하더라도 명을 받들고 왕래할 때에는 털끝만큼도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더구나 신용개는 대신으로 병중에 하문을 받았는데 어찌 그 뜻을 적어 가지고 봉해서 보내지 않았는가?

중종이 더욱 마음을 기울여 특별히 이상(二相; 좌찬성과 우찬성)에 초배(超拜)하려 하자, 이에 사람들은 중종의 뜻 둔 바를 알고 기뻐하였다. 얼마 후 중종이 정승을 제배(除拜)하려 할 때, 신용개는 마침 병으로 집에 있었기 때문에 사관을 보내어 다시 그 의논을 자문토록 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구 한 회(마로 관기, 서울 여의도)
- 연세대경영대학원 졸업.
- 태평양화학그룹 전무이사 역임.
- 능성구씨 대종회 기획이사, 섭외이사.
- 서울특별시종회부회장 역임.
- 현 낙주공종중공동대표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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