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이 날았다는 상서로운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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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이 날았다는 상서로운 마을
  • 곽주희
  • 승인 2005.03.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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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읍에서 25번 국도를 따라 상주방면으로 가다보면 외속리면 장내리가 나타난다.
외속 장안에서 삼가천 둑길을 따라 약 1.6㎞정도 가다보면 마을 동북쪽에 위치한 구병산 줄기 아래 농가들이 포도송이 형상을 이루고 있는 마을이 보인다.

마을 전체가 남향을 이루고 있어 한 눈에 들어오는 느낌이 아주 아늑하고 따뜻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마을 뒷산(구병산 줄기)은 지난 99년 3월 대형 산불로 16ha이상의 임야를 태워 수천만원의 피해가 나 아직도 수목이 우거지지 않아 벌거숭이인 채로 표시가 나 눈에 확 띈다.

봉황이 나는 형국
봉비리는 본래 속리면에 속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봉비리라 하고 1947년 분면되면서 외속리면에 편입되었으며, 새비랭이(鳳飛)와 오리미(梧林)로 부르는 웃말, 아랫말로 이뤄져 있다.

봉비리는 면적 3.58㎢로 외속리면 남쪽에 위치하며, 동은 불목리, 서쪽은 하개리, 남은 탄부면 임한·상장리, 북쪽은 서원리와 접하고 있다.

마을 앞 산 꼴미산(花山)이 봉황을 나는 형국이라서 봉황이 깃드는 오동나무 숲을 만들었는데 여기에 살던 봉황이 낮에는 황곡리 빙경산에서 놀고 저녁에는 다시 날아온다고 해서 새비랭이(봉비)와 오리미(오림)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마을 곳곳마다 전설
큰 골에는 사기를 구웠던 가마터가 있고 절골, 불당골이라 부르는 동쪽에 있는 골짜기에는 절이 있었는데 지금도 흔적이 역력하다. 빈대가 많아 스님이 떠나 폐사되었다고 한다.

사양골은 동북쪽에 골짜기로 옛날 사냥터가 있었다고 하며, 중간에 신바위가 있는데 사냥을 하기전에 제를 지냈다고 한다.

또 예전부터 승지골에 모여 온 마을의 무사안일을 빌고 풍년을 기원하며 정월 보름을 제일로 정해 산제를 지내던 제당이 있다.

이 산신제는 2년동안 맥이 끊겼으나 마을주민들이 다시 생지복덕을 가려 제관과 고향주, 축관 등 3명을 선발, 목욕재개하고 사흘간 치성을 드리고 있다. 올해도 음력 정월 십사일 마을의 무사안녕과 주민들의 평안을 위해 소지를 태우는 등 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또 봉비리 주민들은 매년 정월 보름에 전 주민들이 모여 푸짐한 상품을 걸고 화합을 다지는 윷놀이 행사를 펼치고 있다.

봉비리 서남간으로 흐르는 삼가천에는 진사래보라는 보가 있다. 설에 의하면 조선 정조 때 성균관 진사를 지낸 정가묵이 수리시설이 되어 있지 않은 황량한 넓은 뜰을 개간하기 위해 막대한 재력과 인력을 들여 서원리 북두문이에서부터 보를 파서 하개리와 선창을 거쳐 진사래에 이르기까지 튼튼한 물길을 만들었다.

이때부터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있게 되었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정진사의 공로를 칭송해 진사보, 진사래보라 부른다고 한다.

면내 가장 부유한 마을
봉비리는 남향으로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처럼 부촌으로 농가당 소득이 면내 최고를 자랑한다. 실제 면내 경제권의 대부분을 봉비리 경제가 좌우하고 있고 모든 행정도 봉비리 위주로 이뤄진다는 말도 있을 정도다.

면내 11개 마을 중 인구가 가장 많고(5개반이 있다) 넓은 경지면적과 한우, 과수 등 복합영농을 통해 마을소득이 매우 높으며, 담배, 고추, 잡곡, 인삼 등을 재배, 호당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150가구가 넘은 적도 있었으나 99년말 101가구 314명, 현재는 93호 258명으로 봉비리 마을도 이농현상으로 인해 농촌인구가 줄고 있다. 60세이상 노인인구도 82명(65세 이상 59명)으로 전체 마을인구의 31%를 넘고 있다.

그래도 봉비리에는 젊은이들이 많다. 청년회(회장 김규재, 47세)가 조직되어 있다. 서울 등 수도권에 거주하는 봉비리 출신들이 똘똘 뭉쳐 지난 2000년 11월 재경 봉비리 향우회를 조직, 따뜻한 고향의 정을 나누며 황금곳간 쌀을 구입하는 등 지역 농산물 애용운동을 적극 펼쳐 고향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꼴미산 밑에 충혼비
봉비리 주민들은 매년 현충일에는 전 주민이 꼴미산 밑에 있는 충혼비에 모여 추모제를 지낸다. 6.25전쟁 때 마을 젊은 인재 16명이 전쟁터에 나가 전사를 하는 큰 피해를 당했는데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지난 92년 마을자랑비와 함께 충혼비를 세우고 추모제를 정성을 다해 지내고 있는 것이다.

16명의 호국영령은 육군 소위 권 택, 하사 김운식, 병장 어사선, 상병 김종성, 어 용, 일병 김봉식, 김상학, 김점봉, 박태선, 어길선, 어 준, 어 흡, 이동진, 이진철, 최원식, 이춘영 등이다.

현재 마을에 6.25전쟁에 육군으로 참가해 생존한 사람도 4명이나 살고 있다고 한다.

도시 못지 않은 문화혜택
봉비리는 인구가 많지만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마을 일은 위아래가 서로 상의하고 협조해서 처리한다.

봉비리(이장 송재만, 59세)는 개발위원회와 청년회를 비롯해 노인회(회장 최영식, 70세), 부녀회(회장 박순단, 54세)가 조직되어 마을 일을 보고 있고 새마을지도자는 정용길(40세)씨가 맡고 있다.

번성한 마을답게 봉비리에는 오래 전부터 마을단위로서는 제법 큰 교회가 자리잡고 있으며, 지난 94년 8월 농촌 문화생활 시범마을로 지정, 사업비 6000만원을 들여 44평 규모에 세탁실, 미용실, 건강관리실 등을 갖춘 농촌문화생활관을 개관했다.

800여평이나 되는 야외에는 게이트볼장을 비롯, 농구장, 배구장, 축구장 등의 체육시설과 주민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쉼터를 조성해 항상 주민이 이용하며 농촌 속의 도시문화를 즐기고 있다.

게이트볼장이 개장되자 마을노인들 중 30명이 게이트볼회(회장 이종식)를 조직, 각종 대회에 참가해 우수한 성적을 올리고 있으며, 속리초 게이트볼부 학생들과 함께 꾸준히 실력을 배양하고 있다.

교양실에서는 학생들을 위한 한자 및 붓글씨 교실도 운영하는 등 문화생활관이 주민들의 교육문화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지난 2002년부터 서울대 의대 송촌 의료봉사회에서 봉비리를 찾아 무료 의료봉사활동과 농촌일손돕기 활동을 펼쳐 주민들에게 큰 혜택이 되고 있다.

더욱 발전하는 마을로 변모 모색
지난해 8월 봉비리는 농업기반공사 보은지사의 주선으로 삼가저수지 증설사업 공사업체인 성창산업(주)과 1사1촌 자매결연을 맺고 상호 교류의 물꼬를 텄다.

또한 지난해 8월 25억6300만원의 사업비로 공사를 착공해 오는 2006년 8월 봉비교 가설공사가 완공되면 다리와 도로가 확장돼 원활한 교통소통으로 편리한 생활을 꾀할 수 있게 된다.

처음이라는 것이 좋기도 하지만 나쁘기도 하다고 송재만 이장은 말한다. 군내 처음 문화생활관을 건립했지만 찜질방 등 노인들이 자주 애용하는 시설이 없어 불편하다는 것이다. 지금 신축하는 건강관리실에는 각종 운동기구와 찜질방, 각종 치료기 등도 구비되어 있지만 봉비리에는 없다는 것이다.

송재만 이장은 31%를 차지하는 노인인구들이 자주 활용할 수 있는 찜질방 시설이나 각종 의료기구 등이 구비됐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또 시내버스가 하루 세 번(아침 7시, 9시반, 오후 4시반) 들어오지만 12시10분에 삼가·구병리로 가는 시내버스가 봉비리를 경유해서 갔으면 좋겠다고 한다.

노인들이 9시 반 시내버스를 이용, 아침에 읍내에 있는 병원을 가서 치료를 받고 난 후 4시반 차를 기다리거나 아니면 점심을 먹기 위해 12시10분 삼가·구병리 시내버스를 이용해 장안에서 내려 마을까지 오기는 1.6km정도 떨어져서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그래서 삼가리와 구병리로 들어가는 시내버스가 봉비리를 경유해서 갈 수 있도록 해주었으면 하는 것이 주민들의 가장 큰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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