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슬하던 사람들이 모여 살아 관골
상태바
벼슬하던 사람들이 모여 살아 관골
  • 곽주희
  • 승인 2005.01.22 00:00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새로쓰는 우리마을 이야기 (1) 보은읍 길상2리
서기 470년, 신라 자비마립간 13년에 오정산에 3년동안 쌓은 산성이 사적 235호인 삼년산성이다.

신라는 이 성에 최정예 군사를 주둔시켜 서북쪽 함림산성의 백제군과 맞섰으나 싸움에 늘 패하여 장졸들의 사기가 저하되어 530년 법흥왕 17년에 불교가 공인되면서 부처의 힘으로 원혼을 달래고자 산성 동남쪽 산봉우리를 산중의 으뜸이라는 뜻으로 천황봉이라 이름 짓고 그 아래 길상사라는 절을 지어서 치성을 드리니 마침내 원혼들이 진혼되고 군사들의 사기가 높아 백제를 압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신라는 더욱 큰절을 세워 삼국통일을 기원하고자 553년 진흥왕 14년에 속리산에 법주사를 창건하고 제일 높은 봉우리를 천왕봉이라 하고 이곳 삼봉재 봉우리는 소천왕봉 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는데 창건 목적을 잃은 길상사는 마침내 폐사가 되고 지금은 길상사 옛 절터만 전해오고 있다.

마을이름 길상은 바로 길상사에서 연유되었으니 이 터전에 사람의 왕래가 있었던 것은 실로 1400여년 전부터의 일이다.

문헌에 의하면 조선을 개국할 때 순흥인 안경공은 3등 공신이 되어 량도공으로 봉해지고 이 터전을 사패지지로 하사받아 1421년 이곳에 그의 불조묘를 건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이때에 마을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진다.

예안인 이수돈은 성종 때 이곳에 와서 정착하였고 이항은 기묘사화 때, 순흥인 안수는 정묘호란 때, 경주인 최상남과 안동인 권채응은 인조 때, 영산인 김준군은 정조 때, 안동인 권지인과 용범은 순조 때 입향하였다.

그뒤 삼산이씨, 남원양씨, 인동장씨, 밀양박씨, 영해박씨, 경주김씨, 순천박씨, 청주한씨, 주원윤씨, 은진안씨, 부여서씨 등이 찾아와 정착하여 두개의 마을로 번창하였으니 양지편은 양달에 형성되었다는 뜻이고 관동은 사람이 살기좋은 곳이라는 뜻으로서 조선 말기까지 보은현 사각면 관할이었다.

1914년 3월1일 행정구역을 통폐합 할 때 보은군 읍내면에 편입되고 1917년 보은면으로 개칭, 양지편은 1리로 관골은 2리로 구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19년 3월1일 독립만세운동 때에는 이창선 등이 앞장서고 길상리와 구인리 사람들이 길상리 삼봉재에 올라 횃불을 올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쳐대던 3·1운동의 진원지였으니, 이터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기개와 애국애족의 정신이 자랑스럽다.

삼국통일 기원하던 길상의 터전위에 천황봉은 정기되고 효제충신 근본이니 사람마다 어질고 우뚝하다 만세소리 밀물처럼 멀리멀리 퍼졌으니 뿌리깊은 이 터전 나날이 새로우리
- 96년 6월 2일 건립한 길상마을 유래비 전문

■길상리의 위치
보은에서 상주방면으로 25번 국도를 따라 5분 정도 달리다 보면 오른쪽 편으로 논 저너머에 야트막한 산 아래로 병풍을 쳐 놓은 듯한 마을이 나타난다.

180년에서 370년된 군 보호수인 느티나무 3그루에 감싸여 있는 길상2리(관동, 官洞)는 보은읍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외속리면 구인리, 서쪽은 어암리, 남쪽은 탄부면 평각리, 북쪽은 대야리, 누청리와 접하고 있다.

길상2리는 보은군 사각면 지역으로 신라 때 길상사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길상리라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관동을 병합하여 길상리라 하고 읍내면(보은읍)에 편입되었고, 1917년 보은면으로 개칭, 양지편은 1리로 관동은 2리로 구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길상리의 유래
길상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연유에 대해 유래비에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지만 주민들 사이에서는 설득력있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마을주민들은 마을 뒷산인 천황봉 정상 부근에 있는‘매샘물’때문에 이 마을이 생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매샘물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길상사라는 절이 생길 수 있었고 절이 생기므로 인해 마을이 형성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매샘물은 사시사철 일정한 양의 물이 솟는 샘물로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차가운 물로 물맛이 좋기로 유명, 옛날 마을이 한창 번성했을 때에는 100여호에 달했을 정도로 이 샘물 하나로 온 마을 사람들이 먹고 쓰는데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다고 한다.

특히 이 샘물은 발원지가 산 정상 부근으로 수원이 부족해 보이나 항상 일정한 양의 물이 솟아 신비함마저 주고 있다.

지난 67년 당시 고 박정희 대통령의 하사금 100만원으로 상수도 시설을 이곳에 설치해 지금까지도 이 물은 전체 주민이 식수원이 되고 있다.

길상2리는 관골 또는 관동(官洞)이라 부르는 관골이라는 말은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라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하며 마을 뒷산인 천황봉의 형상이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관(冠)을 씌워놓은 듯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또 주민들은 옛날 벼슬을 했던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어 관동이라고 한다고 말한다.

■ 상경하애하는 행복한 마을
관골에는 마을 심부름꾼인 이장 안치권씨, 노인회장 최용필옹, 부녀회장 전예순씨, 새마을지도자 장화진씨, 청년회장 권병은씨 등을 비롯해 45가구에 113명이 살고 있다.

옛날에는 순흥 안씨, 예안 이씨, 안동 권씨 등이 주로 거주 이들이 집성촌을 이뤘으나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정착해 각성을 이루고 있다.

관골은 장수마을로 손꼽을 만한 곳이기도 하다. 현재 환갑이 지난 노인들이 50여명으로 마을 인구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마을 사람들이 장수하는 비결에 대해 주민들은 함께 마시는 매샘물과 공기가 좋기 때문이라며 또한 사람들이 순박하게 큰 욕심을 내지 않고 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관골에서는 정월 대보름 마을주민들의 화합과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윷놀이 행사를 펼친다.

행사가 펼쳐지면 청년회와 부녀회에서는 마을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음식을 장만하는 등 마을의 궂은 일을 도맡아하고 있다.

또한 4년째 마을심부름꾼으로 봉사하고 있는 안 이장은 이장 수고비를 모아 매년 연말 마을노인들을 대상으로 관광을 시켜드리는 등 상경하애하며 화목한 마을을 가꾸어 가고 있다.

■ 고추가 유명한 관골
관골의 경지면적은 논인 45ha이고 밭이 11ha이다. 벼농사를 위주로 하는 마을로 밭에는 고추를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다.

관골에는 고추 작목반이 구성돼 있는데 관골의 고추는 군내는 물론 서울 등지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다.

특히 붉은 생고추를 예전에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 등으로 출하해 호평을 받기도 했으며, 현재까지도 그 유명세를 이어가고 있다.

■ 애향심과 공무원이 많은 마을
관골은 주민들이 어느 곳보다도 화합이 잘되며 화목한 마을로 특히 출향인들의 애향심이 대단한 곳이다.

지난 96년 6월에 제막식을 가진 마을 유래비 건립에도 주민들은 물론 출향인들이 성금을 보내와 건립비보다 더 많은 성금이 모금되기도 했다.

이처럼 자주 고향을 찾아와 마을의 애경사를 함께 나누는 출향인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출향인들은 매년 명절에 내려와 경로당 유류대로 성금을 기탁하는 한편 마을 일에 솔선수범 참여하는 등 애향심을 발휘하고 있다.

특히 관골은 1919년 기미 독립만세 운동이 한창일 때 뒷산인 삼봉산 정상에서 음력 4월 13일 밤 자정을 기해 이인하, 이준용, 이창선, 김용석 의사들이앞장서고 길상리와 구인리 사람들이 횃불을 올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쳐대던 3·1운동의 진원지로 마을주민들의 기개와 애국애족의 정신이 남다른 곳이기도 하다.

관골이 더 유명한 것은 작은 마을에서 공무원이 많이 배출되었다는 것이다.

이 마을에서 현재 공무원으로 재직중인 사람이 35명이 이르며, 서기관급이 5명, 사무관도 4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길상2리가 관골이라 부르는 것이 아닌가 싶다.

■ 노인들을 위한 운동기구 마련 숙원
마을주민 절반이 60세 이상 고령으로 노인들을 위한 건강관리기구가 필요한 실정이다.

마을주민들은 겨울철 하는 일없이 경로당에서 무료하게 보내는 노인들을 위해 온열치료기, 안마기, 발맛사지기 등의 치료기와 런닝머신 등 헬스기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인심 좋고 범죄없는 마을이지요. 옛날부터 한 샘물을 먹으면서 서로 다른 성씨들이 잘 융합해 살고 있어요. 경로당을 찾는 노인들의 건강을 위해 운동기구와 치료기 등을 마련하는 것이 유일한 바람입니다. 좋은 날이 오겠지요.” 이장 안치권씨의 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정정근 2011-11-09 20:01:33
안치권 이장님, 수고 많으십니다. 1951~52년에 양지편 살았던 사람입니다. 충북 중원군 신니면이 고향인 저희의 피난지였지요.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오빠, 저, 여동생이 살았었습니다. 당시 부친께서는 장안국민학교 교사였지요. 이제 어르신들은 다 돌아가셨습니다.예순네 살의 나이가 되고 보니 오래전 일들이 생각나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몇 자 올립니다. 구장님 댁 바깥마당에서 감꽃 줍던 생각이 나는군요.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