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장 인물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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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 인물 탐방
  • 보은신문
  • 승인 2004.1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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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암 김정(金淨)선생
내고장 인물 탐방
충암 김정(金淨)선생(7) (1486∼1521)

5.오현단
오현(五賢)이란 유배되거나 관직에 있으면서 제주에 머무르는 동안 도민을 교화하고 선비정신을 일깨워 낙후된 제주에 새로운 문화적 기운을 일으킴으로서 훗날 제주인으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는 다섯 분의 현인을 말한다.

오현은 중종 15년(1520)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제주에 유배되어 사사된 충암 김 정, 중종 29년(1534) 제주목사로 부임했던 규암 송인수, 선조 34년(1601) 안무어사로 내려왔던 청음 김상헌, 광해군 6년(1614)에 동계 정온, 숙종 15년에 유배된 우암 송시열, 등 다섯 분이다. 충암 김정은 제주에 머무르는 동안 제주도민의 생활풍습개혁, 미신타파, 도민교화와 학문에 힘썼으며, 저서로 제주의 풍습이나 자연환경을 최초로 소개한 <제주풍토록>을 남겼다.

규암 송인수는 목사로 재임하는 동안 인애와 덕행으로 백성을 교화하였으며, 동계 정온은 유배지인 대정을 중심으로 지방유생들을 교학하였다. 청음 김상헌은 민심수습과 도민교화에 힘썼으며 당시 제주사정을 알게 해주는 <남사록>을 남겼다.

우암 송시열 역시 제주에 머무는 동안 유생을 교육하였는데 현재 오현단 암벽에 그의 필적인 “증주벽립(曾朱壁立)”마애명이 남아있으며, 충암과 우암의 정려유허비가 있다. 이렇게 위 다섯 현인들은 깊은 학식과 고매한 인품을 지녀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이들은 제주에 머무르는 동안 도민을 교화하고 선비정신을 일깨워 주어 뒤쳐졌던 제주에 새로운 문화적 기운을 일으킴으로써 훗날 제주인들은 이들을 오현이라 추앙하여 귤림서원에 배향하였다.

오현단의 유래는 선조 11년(1578) 판관 조인후가 유배중 제주도민교화와 미신타파, 흥학교육을 위해 헌신한 충암 김정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적소(유배되어 있던곳)였던 가락천 동쪽에 충암 묘(사)를 짓고 제사를 지낸데서 비롯된다.

그 후 현종6년(1665) 판관 최진남이 충암 묘를 현재의 오현단 경내로 옮겨 사(祠)로 하고, 원래 이곳에 세워졌던 장수당을 재(齋)로하여 귤림서원이라 하였다. 그리고 숙종8년(1682) 규암 송인수, 현종 10년(1669)에 동계 정온과 청음 김상헌을 추가하여 배향하였고, 숙종21년(1695)에는 우암 송시열을 마지막으로 추향함으로써 오현(五賢)이 되었다.

귤림서원은 숙종 8년(1682)에는 사액을 받았고, 그후 제주 유생들의 교학 활동과 지방 문화의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고종 29년(1892) 김희정(金羲正) 등 제주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귤림서원 자리에 오현의 뜻을 기리고자 조두석(俎豆石)을 세우고 제단을 축조하여 제사를 지내었다. 그래서 오현단에는 지금도 오현의 위패를 상징하는 조두석이 각자 (刻字)없이 배열되어 있다.

이렇듯 오현(五賢)의 숭고한 교육애(敎育愛)는 교육의 불모지였던 이 고장에 학문을 일으켜 탐라인(耽羅人)의 가슴에 참과 슬기와 꿈을 펼치게 함으로써 제주교육사에 신기원을 이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정신을 계승하는 뜻에서 해방과 더불어 우공 황순하 (牛公 黃舜河)先生이 五賢壇 경내(境內)에 학교를 설립하고 교명(校名)을 “五賢”이라 하였는 바 오현고등학교는 제주의 명문으로, 제주교육의 선도적 역할을 해오고 있다. 오현단 경내에 위치했던 학교는 1972년 9월 25일 현위치(화북동 4675번지)에 신축, 이설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방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어 있는 오현단은 제주시 이도1동 142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6. 상현서원
한국 최초의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1610년에 사액된 서원으로. 1977년 12월 6일 충청북도기념물 제43호로 지정되었다. 상현서원은 본래 지방유림에서 우리고장 출신인 기묘명현 충암 김정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하면서부터 시작 되었다.

그 후 참봉 안황이 서원 건립을 추진하던 중에 성제원 현감이 부임, 1555년(명종10년) 삼년산성 안에 충암(沖庵) 김정(金淨)을 향사하는 독향원(獨享院)을 세우고 ‘삼년성서원’이라 하였는데, 1610년(광해군 2)에 ‘상현’이란 이름의 사액(賜額: 임금이 서원의 이름을 지어줌)을 받았다. 해마다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에 제사를 지낸다.

1672년(현종 13) 삼년성 안에서 외속리면 서원리로 옮겨 세웠으며, 대곡(大谷) 성운(成運)을 을사명현으로 배향하고 보은현감을 지낸 동주 성제원과 중봉(重峯) 조헌(趙憲)을 1681년(숙종 7)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1695년(숙종 21)에 추가 배향하여 5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이후 선현제향과 지방교육을 담당하여 오다가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져 전국에서 47개서원은 그대로 존속되었으나 본서원은 관리부실과 업적부진 등의 사유로 폐원되었다 . 그때 서원의 강당은 보은향교(報恩鄕敎:충북유형문화재 95)로 옮겨 명륜당을 세웠다.

그 후 1892년(고종 29) 찰방 김세희(金世熙)가 옛터에 제단을 만들어 제향을 올렸으며, 1896년(고종 33) 장례원집례인 김문희(金文熙)와 송근수(宋近洙)가 삼간띠집으로 재건하고, 1949년에 중수하였다. 1986년에는 정부예산으로 사당과 정문을 새로 세우고 바깥담을 쌓았다.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우진각지붕 단층목조건물로 앞면 반 칸에는 마루를 놓고 어칸에는 쌍각문을, 오른쪽과 왼쪽 협칸에는 편문을 달았으며, 주위에 토석담장을 쌓고 중앙에 편문을 달았다. 서원 입구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우진각지붕집 형태의 묘정비각이 있고, 안에는 1778년(정조 2)에 세운 상현서원 묘정비가 있다. 비문은 예조참의 김양행(金亮行)이 짓고, 사헌부수령 김종후(金鍾厚)가 썼다 사우 앞에는 내문인 일각문이 있고 일각문 앞에는 묘정비와 이를 보호하기 위해 비각이 있다.

비각 안에는 1949년 김명구가 쓴 상현서원중수기기문판이 걸려 있다. 1672년에는 현 위치인 서원계곡으로 이전하였는데 이는 평소 자연천석을 좋아하고 풍광을 즐기던 충암 선생의 취향을 고려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7.고봉정사
1981년 5월 1일 충청북도지방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중기에 충암 김정(金淨:1486∼1520)이 고봉(孤峰)이라 칭하고 학문을 연마하던 곳으로 삼현정이라고도 한다. 삼파연류봉(三派連溜峯) 정상에 김정, 최수성(崔壽城:1487∼1521)이 고봉정(孤峰亭)을 세우고 은거하였다.

후에 병암(屛菴) 구수복(具壽福:1491∼1545)이 이어받았다. 이들이 죽은 후 구수복의 5대손인 구이천(具爾天)이 퇴락해 있던 정자를 봉 아래로 옮겨 현재의 고봉정사를 지었다. 원래 정사(精舍)란 명망있는 선비가 경승지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가르치던 일종의 사립교육시설이다.

김정은 1507년(중종 2)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정언(正言)·순창군수 등을 지냈으나 폐비 윤씨의 복위를 상소하였다가 유배되었다. 1516년(중종 11)에 재등용되어 도승지·형조판서를 지냈으나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사사되었는데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최수성은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시문·서화·음률·수학에 뛰어난 학자였다. 기묘사화 때 많은 동지들이 처형되자 관직을 버리고 유랑하던 중 1521년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사형되었는데 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어 강릉향교에 배향되었다. 구수복은 이조정랑에 재직 중 역시 기묘사화에 휘말려 파직되었으나 1533년(중종 28) 복직되어 구례현감으로 재직 중에 죽었는데 후에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익공집으로 오른쪽 2칸에는 분합문(分閤門)을 단 마루방을 두고 오른쪽 1칸에는 띠살문을 단 온돌방을 두었다. ‘孤峰精舍(고봉정사) 현판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친필이다.

그 밖에 1981년에 정사를 해체보수하고 고봉사(孤峯祠)와 관리사, 외삼문 등을 새로 지었다. 사당인 고봉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홑처마 맞배지붕을 올린 물림집으로 지붕 좌우 측면에는 풍판(風版:비바람을 막기 위해 박공에 이어 대는 나무판)을 갖추었다.  고봉사(孤峰祠)의 현판은 전대통령 최규하의 휘호이며 사우에는 김정, 최수성··구수복 3인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봄과 가을에 제향하고 있다. 관기를 벗어나 기대리로 가는 길 오른 편에 위치하고 있다.

8.제주풍토록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이자 기묘명현의 대표격인 충암 김정이 제주 대정에서의 유배생활에서 체험한 그곳의 풍토와 상황을 사실적으로 기록한 글이다. 그의 문집인「충암집」권4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은 작자가 중종14년 기묘년(1519)에 일어난 기묘사화로 인하여 진도에서 제주도로 이배되었던 중종15년(1520) 8월부터 사사(賜死)되던 이듬해 중종16년(1521) 10월까지 1년여 기간동안 언제 사약이 내릴지 모르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삶에 대한 의욕을 잃지 않고 생생한 체험 기록을 담고 있으며, 학자로서의 풍모를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어서 더욱 값지다.

구성은 크게 지리적 환경, 풍물과 습속, 언어와 사회상, 토산물과 특산물, 유배지의 환경과 정신적 상황의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주의 기후는 겨울에도 덥고 바람이 세어 병들기 쉽고, 비 오는 날이 많아 물기가 많고 가옥들은 초가가 거의 대부분이며 새끼로 얽어매었으며, 집이 깊숙하고 침침하다고 적고 있다. 풍속에 대해서는 이들이 귀신을 숭상하고 있고 무당이 많으며 뱀을 신으로 받들고 있어, 뱀을 죽여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그들은 뱀에 대한 신앙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개탄하고 있다.

말소리가 본토와는 크게 다르고 산물로는 노루 사슴 꿩 참새 전복 오징어 등이 많고, 사기그릇과 유기그릇은 없다고 하였다. 또한, 가장 이상한 것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데도 소금이 부족하여 진도나 해남 등지에서 수입해다 쓰고 있는 점이라 하였다.

충암의 눈에 비친 당시 제주의 사회상은 문명의 암흑지대였다. 학문하는 사람이 거의 없고 부정과 비리가 난무해 정의가 외면당하고 약육강식의 동물적인 생리가 판을 치며, 종교가 사회적 비리에 편승하는 등 반문명의 양산지로 보인 것이다.

끝으로 위리안치된 유배지 주변의 절망적 상황에서도 생의 의욕을 포기하지 않고 과실수를 심어 보기도 하고 남몰래 한라산을 오르기도 한다고 하였다.

이 작품은 다른 기행문에서 볼 수 없는 비장함을 엿볼 수 있다. 지방의 풍토와 문화를 기록한 풍토기는 대개 각종의 관찬(官撰 )사료에 많이 나타난다.

물론 그 편찬의 의도는 백성을 교화하고 지배하기 위한 통치자의 편의성에서 출발하여 정치적 목적에 제공되었으나, 이 글은 이러한 성격에서 벗어나 실 체험을 바탕으로 16세기 제주지역의 풍토와 상황을 생생하게 그려낸 최초의 제주풍토지라는 점과, 문학적으로도 훌륭한 한문수필이라는 점에서 크게 평가 받고 있는 작품이다.
흥미롭고 귀중한 내용이므로 번역전문을 소개하고자 한다.  〈다음호에 계속〉
/김 홍 영(마로 갈평)
·보덕중(5회)중동고, 고려대
 고려대 경영대학원
·한국 증권거래소(26년), 현대증권
·미시간 주립대 학술연수(2년)
·경기대사회복지대학원
·재경보덕중 직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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