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장 인물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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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 인물 탐방
  • 보은신문
  • 승인 2004.10.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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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암 김정(金淨)선생(2) (1486∼1521)  
2. 김정 (충암)의 생애
김정(金 淨)은 1486년 (성종 17년) 9월 5일, 충청도 보은 성족리에서 정랑 김효정(正郞 金孝貞)과 판관 허윤공(判官 許允恭)의 딸 許씨 부인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원충(元沖), 호는 충암(沖庵), 고봉(孤峰)이며 본관은 경주(慶州),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어려서 할머니 옥천 황씨에게 글을 배웠는데 3세에 문자를 터득하기 시작하여 9살 때 사서(四書)와 경서(經書)에 통하였고, 글도 보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여서 글의 내용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나 명망 있는 학자들도 따를 수 없을 만큼 학문적인 성취가 빨랐다고 한다.

1499년(연산군 5년) 14세에 별시 초시에 장원하였고, 15세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18세 때 진사 송여익(宋汝翼)의 딸과 결혼하였다.

19세에는 갑자사화가 일어나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출사(出仕)하지 아니하고 삼각산 청량사에서 독서하였다. 20세에 11잠(箴)을 지어 유학자로서의 심성과 행실의 지표로 삼고 자성과 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1잠은 자신의 생활신조를 적은 일종의 자경문(自警文)으로 무려 1만여 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되어있어 젊은 나이에 벌써 성인의 도를 깨닫고, 고고한 정신세계에 이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는 할머니 황씨에게서 학문을 배운 바 있으며 특별히 사사한 일이 없으나 서당에 나아가 좌전을 읽었는데 그날 배운 것은 한자도 틀리지 않고 다 외웠다는 기록이 있으나 스승의 성명은 드러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자학(自學)에 의하여 성취된 학문으로 추측된다.

장지연의 유교연원에는 충암이 안정, 신영희의 문인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신영희는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김굉필, 정여창, 남효온 등과 교우를 맺고 학문을 깊이 연마한 사림파 학자로 학덕과 문장으로 추앙을 받는 인물이며, 안정과 충암은 사제관계나 학문적 영향 관계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어 수학기간이 극히 짧았던 것으로 보인다.

21세에는, 고봉정사(孤峰精舍)에서 강학을 하였으며, 이곳에서 구병암(具屛庵), 최원정(崔猿亭) 등과 함께 지내며 학문을 강론하고 두터운 교분을 맺었다. 벼슬에 나간 뒤에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학자들에게 내리는 사가독서를 받아서 눌재 박상과, 양곡 소세양 등 명유들과 깊은 학문적 교류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22세 봄에는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으며, 30세에는 순창(淳昌)군수로서 신하의 대의와 명분을 내세워 담양(潭陽)부사 박상(朴祥)과 함께 페비신씨(廢妃 愼氏)의 복위(復位)를 상소하였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30세 되던 8월에 보은 함림역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3월에 방면되어, 성균관 사예(司藝)로 서용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금강산, 속리산 등을 찾아 자연 속에 침잠하며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이 시기에 충암은 자신의 상소로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대세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고 ,부정하고 부도덕한 것이면 절대 타협할 줄 모르는 지고한 선비정신을 가졌다는 점과, 절의지신으로 불굴의 사림임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봄부터 여름까지 여러 차례 속리산에 들어가 도솔암에 침잠하며, 성현들의 책을 읽고 밤낮없이 단좌하여, 마음의 선악과 공사를 분간하는 능력을 갖도록 깊은 사색에 잠겼다.

이 시기에 많은 선비들이 그의 거처를 알고 찾아와 충암의 학문과 사상을 배웠는데 .김봉상(.金 鳳祥), 김고(金 顧) 김천부(金天富), 김천우(金天宇) 등이 그에게 수학한 사람들이다. 충암은 이들에게 학문하는 자세를 설명하고, 장부의 처세론과 정치가의 자세 및 정치의 이상적 이념을 당우 3대에 두었음을 가르쳤다.  이때 그는 사환(士宦)과의 인연을 끊고 아호천석(雅好泉石)의 지취(志趣)를 마음껏 누렸다. 이때 남긴 “총석정중수기(叢石亭重修記)” “제총석정(題叢石亭)” “만폭동(萬瀑洞)” “금란굴(金蘭窟)” 등의 시문은 명문으로 사람들에게 많이 회자되고 있다.

33세 봄에는 대사헌(大司憲)을 제수 받고 다시 대제학(大提學)으로 옮겼으며, 정암 조 광조와 함께 한(漢) 나라에서 실시했던 현량방정과(賢良方正科)를 본받아 현량과(賢良科)설치를 건의해 과거제도의 단점을 보완하는 한편 실천적 덕행을 우선하는 도학정치의 기틀을 마련코자 하였다.

연산군의 학정을 경험하면서 학정이 군주의 부덕(不德)에 기인한 것으로 판단한 김정, 조광조 등을 비롯한 사림파는 도학정치의 실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군주 즉 임금의 수기(修己)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34세 5월 충암은 형조판서(刑曹判書) 겸 양관 (兩館)[ 藝文館 :예문관 弘文館:홍문관] 제학(提學)이 되었다.

이때 충암을 비롯한 사림파(士林派)의 지치(至治)를 위한 업적을 보면 1)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을 보급하여 예교(禮敎)를 두텁게 하였고, 2)묵은 악습을 타파하고 바른 풍습을 일으켜 국민전체의 학문과 바른생활을 위하여 향약(鄕約)을 실시하는 등 백성교화에 힘썼다.

즉 宋나라의 여씨향약을 본받아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란상휼(患亂相恤)을 근간으로 하는 권선징악(勸善懲惡)과,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향촌의 자유규약인 향약((鄕約)을 실시하였다. 3)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하고, 민간에 뿌리 깊은 미신을 타파하여 오직 국교에 의한 건전한 민중생활로 유도하였다. 4)학과시험에만 의존하던 과거제도를 인품과 덕행을 함께 판단할 수 있는 현량과를 설치하여 유능한 인재를 널리 구하는 한편 5)정국공신(靖國功臣)들의 지나친 공훈을 깍아서 요행(僥倖)의 권문(權門)을 막고 6) 고리대금업을 중지시키고, 구태의연한 제도와 전통적인 인습을 혁파하는 등 유학의 진흥과 도학정치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훈구대신들의 배제된 채 주도세력이 급진적으로 추진하였기 때문에 문제를 안고 있었다. 더욱이 中宗은 개혁에 동조하면서도 임금의 엄격한 수기를 강요하는 신진사림파의 주장에 내심으로는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지치(至治)의 실현을 꿈꾸던 사림파들은 훈구세력의 미움을 받게 되는데 훈구세력의 반발은 위훈삭제사건(僞勳削除事件)을 계기로 폭발되었다. 위훈삭제란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이 왕이 될 때 공이 없으면서도 공신의 대열에 오른 남수자(濫受者) 76명의 인사들이 무더기로 공훈대열에 포함되어 물의가 있었는데 이를 바로 잡자는 것이었다.

이에 격분한 남곤, 심정, 홍경주 등 훈구세력은 주초위왕(走肖爲王) 즉 조광조 일파가 왕이 되려한다는 모략으로 왕을 움직여 신진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기묘사화를 일으켜 신진사림들을 제거하였다. 그리하여 조광조는 능주에, 충암은 금산, 진도를 거쳐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결국 중종을 도와 지치의 이상을 실현하려던 충암을 위시한 사림파의 개혁의지는 중도에서 좌절되고 말았다.

(다음호에 계속)

김 홍 영(마로갈평, 재경 보덕중동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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