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유생의 사학기고나 상현서원(象賢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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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유생의 사학기고나 상현서원(象賢書院)
  • 보은신문
  • 승인 1990.09.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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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탐구, 후학양성의 지방교육문화터
서원(書院)은 향교(鄕校)와 더불어 조선중엽부터 유생의 사학기관으로 학문을 탐구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기능은 물론 성인군자를 받들어 제사를 모시면서 그들의 유훈을 본받았던 곳이다.

무분별한 서구문화의 유입속에 피폐화된 현대인의 정신건강을 정화시키고, 어질고 덕망있는 현인들을 추모하는 춘추제향을 받들어 후세인의 정신속에 전통문화를 면면히 내려오게 하는데 그 중심역할을 하고 있는 역사적 유물중의 하나가 지방유형문화재 48호로 지정된 상현서원(象賢書院)이다.

소나무숲을 뒤로하고 맑은 계곡을 바라보며 외속리면 서원리에 위치한 상현서원은 조선 명종 7년(1552) 동주 성제원이 보은현감으로 부임하면서 서원 건립을 제창, 명종 10년(1555)에 삼년선안을 서원을 건립하였다.

충암선생이 나고 대곡 성운과 같은 석학이 머물고 있는 선비의 고장에 선비들의 구심처가 될만한 곳이 없어 서원 건립을 제창한 것으로, 보은에서 출생하여 형조판서를 지낸 충암 김정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그의 유적을 추모하는 춘추제향을 받드는 서원을 건립, 삼년성안에 있어 삼년성서원(三年城書院)이라 하였다.

이것은 광해군2년(1610)에 우리나라에서 2번째로 사액을 받아 상현서원이라 고치고 현종 13년(1672)에 삼년성안에서 지금의 외속리면 서원리로 자리를 옮겨 충암 김정선생외에 대곡 성운선생, 동주 성제원선생, 중봉 조헌선생의 위패를 숙종7년에, 그리고 숙종21년에는 우암 송시열선생의 위패를 함께 모시고 춘추제향을 받들었다.

그러나 고종8년(1871)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그 건물이 헐리어 명륜당을 보은향교 명륜당으로 옮겨 세워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고종33년(1896)에 서원리의 철거했던 옛터에 다시 장례원집의 (掌禮院執義)로 있던 김문희에 의하여 서원이 재건되고, 일제하 1919년 기미만세운동이 있었던 해에 유림대표 어윤원, 강대원, 정호섭등에 의하여 개축, 오늘에 이른 것을 지난 '86년 국비 2천6백만원을 들여 해체 복원하였다.

옛날에는 이 서원에 김정의<충암집(沖庵集)> 5권과 성운의 <대곡집(大谷集)> 3권의 판목을 보관하고 있었으나 유실되어 버렸다한다. 다만 서원의 입구에 정면1칸 측면1칸의 우진각지붕의 묘정비각이 있고 그안에 인조2년(1629)에 세운 상현서원묘정비(象賢書院廟庭碑)가 서 있는데 비문은 김양행이 글을 짓고 사헌부 장령 김종후가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상현서원으로 매년 봄·가을로 2월 중정일(中丁日)과 8월 중정일에 제사를 드리고 있는 선현들을 살펴보면 처음 창건당시 배향되었던 충암 김정선생은 보은 군내에서 동리 터가 좋다고 하는 북실에서 태어나 중종2년(1507)에 22세의 나이로 대과에 장원급제, 관계에 진출하여 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을 지냈고 관직생활 10여년만인 34세에 형조판서를 역임한 보은이 낳은 큰 역사적 인물이다.

충암선생은 박상과 함께 폐비 신씨의 복위를 상소하였다가 유배되었었고 조광조와 더불어 부패된 훈구세력을 조정에서 몰아내고 정사를 개혁하며 현량과를 세워 인재를 등용하고 언로(言路)를 열어 공론을 수렴하며 향약을 보급, 실천케하여 풍속을 순화시키는 등 크게 선정을 펴려 하였으나 간신들의 모함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519년 기묘사화때 조광조등과 함께 투옥되었다가 36세를 일기를 제주도에서 사사되었다.

동주(東洲) 성제원(1506~1559)은 서봉(西峰) 유우(柳 )ml 제자로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정통한 한편 지리학, 의학, 복술 등을 배우고 만년에 이르러 보은현감을 지낼 때 산수를 즐기면서도 직무에 충실하여 칭송이 자자하였다.

대곡(大谷) 성운선생은 조선 선조때의 은사(隱士)로 30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그의 형이 을사사화로 화를 입자벼슬을 버리고 보은으로 피하여 대곡이라 호를 짓고 숨어살아 대곡선생이란 칭호를 얻기도 하였다.

중봉(重峰) 조헌선생은 조선 선조때의 문신이며 율곡 이이의 문인중 가장 뛰어난 학자의 한사람으로 기발이승일도설을 지지하여 이이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보은 현감을 지내며 비언칠사(備言七事)를 목민관으로서의 행정지표로 삼을 것을 주장하여 보은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었다.

중봉선생은 일본 침략에 대비 국방력의 강화를 주장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했던 제자를 비롯하여 보은, 옥천지방에서 농사짓는 장정들을 규합, 의병을 일으켜 승병과 함세, 청주를 수복하고 이어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위해 금산으로 향했으나 전공을 시기하는 충청감사의 방해로 대부분의 의병이 해산당하고 불과 7백여명의 의병으로 금산 전투에 참가, 끝까지 용전하다 의병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에 군내에서는 상현서원에서 위패를 모시는 것과 아울러 후율사를 세워 중봉선생의 애국충절을 기리고 있다. 대정치가요, 도학자인 우암 송시열선생을 배향한 서원이 전국에 70여개소이고 사액서원만도 37개소에 달하고 있는데, 상현서원에서 위패를 배향하게 된 동기와 인연은 다음과 같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봉림대군이 심양으로 볼모로 잡혀가게 되자 우암은 편모를 모시고 보은으로 피난하여 은거하던 중 보은의 선비들과 어울려 학문을 담론하고 후진의 면학을 지도하기도 하며 한동안 머물게 됨으로써 보은 지역과 인연을 맺었고, 말년에는 우리고장과 가까운 속리산 너머 화양동에 은거하면서 우리고장 신비들의 정치의식과 예법, 그리고 생활철학에 이르기까지 크게 영향을 끼쳐 상현서원에 배향하게 된 것이다.

과거 시대를 주름잡던 교육문화의 터전이었던 서원은, 저속해진 문화의식이 일간지 사회면을 채우고 있는 시대속에서 지역문화의 장(場)으로서의 전환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현상황에서 서원은 1년에 한두번 성현들에게 예를 올리고, 유적지 순례의 한 경우지로서 형식에 치우쳐지고 아울러 묵묵히 세월을 탓하고 있기만 한 것은 아닐는지…

다만 상현서원 원장 이흠수(66)선생의 “자기 이익에 치중하기 보다는 정의를 굽히지 않는 선비정신을 계승,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자리잡아 가야 할 것”이라는 말을 되새기며, 발길을 돌리는 기자는 서원의 푸른 뜨락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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