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년을 문밖출입 못한 이기동씨
“한번만이라도 남들처럼 자유롭게 걸어보고 죽었으면 여한이 없겠어요”미끄러져 내려간 한쪽 다리를 끌어올리며 열어 젖힌 방문 너머 먼 산을 바라보는 이기동(69세)씨의 눈에 눈물이 글썽인다. 6.25사변때 머리관통상을 입고 반신불수가 되어, 문밖출입 한번 못하고 벽에 기대앉은 채 40여년을 살고 있는 국가 보훈대상자 등 집안식구들의 손을 빌리지 않고는 아무 거동도 할 수 없어 식구들이 들에 나간 후 빈집을 지키며 세월을 보내고 있다.
이씨는 1950년 12월, 9사단 29연대 이등병으로 참전, 공주 계룡산에서 부상을 당한 후 지금까지도 6·25의 상흔이 아물지 않은 채 인간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그립고 읍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요. 자식들 결혼식에도 참석치 못했을 때가 제일 서운했어요” 삼대독자인 이씨는 부산 삼랑진 피난 도중 군 입대를 했었다. (당시 29세) 그러던중 그의 부상소식을 받은 아버님이 “대라도 잇고 가야하지 않겠느냐”며 병원에서 데리고 나와 고향에서 가정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이때 군에서는 기피자로 처리되어 보훈대상자에서 누락되었었다.
가족들의 생계가 막막해진 이씨는 목발에 의지한 채 8번이나 육군본부를 찾아가는 등 해서 5년만에 보훈대상 1급 통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처음 7천원으로 시작된 보훈 혜택으로는 가정살림을 꾸려나가기 어려웠다.
“자식들 키우고 교육시키며 살림 돌보느라 마누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라며 부인의 노고를 애틋해 하는 이씨는 남북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아쉬움 속에 지금도 방안에서만 생활하는 고통이 그저 무겁기만 하다.
“지금으로선 개인적으로 아무 바라는 것이 없어요. 그저 이만한 생활에 만족하고 다만 민족이 하나가 되는 통일이 빨리 이루어졌으면 해요”하는 이씨의 주름진 얼굴에 자유의 고귀함을 통감하는 기운이 잔잔히 감돈다.
이기동씨는 부은 정순남씨(70세)와의 사이에 2남1녀를 두고 현재 농업에 종사하는 큰 아들과 함께 생기골(교사1구 287-1)에서 살고 있다.
저작권자 © 보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