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영하는 맛으로 인생의 위로를 받는 그의 이력을 뒤늦게 알게 됐다. 바로 중국 조선족 출신이며 지금은 한국인으로 귀화한 결혼이주여성이란 사실이다.
이 씨의 고향은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있는 주도인 옌지(연길)시다. 옌지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 국경분쟁이 일어난 간도지방의 중심지이다. 또한 옌지는 13억 인구의 중국에서 우리 동포가 당당하게 자치를 실현하고 있는 중심지이며, 600만 해외동포 가운데에서 자치권을 확보하고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그는 옌지에서 을지문덕, 이순신 장군 등 한국의 역사를 배우며 백의민족 후손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자랐다. 하지만 중국내 소수민족으로서의 서러움도 많이 겪어야 했다. 중국내 주류인 한(漢)족이 조선족과 한국인을 비하할 때 사용하는 ‘꺼우리빵즈(高麗棒子)’란 말이 있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고마운 나의 조국, 너무도 행복해요”
‘꺼우리빵즈’의 글자 그대로의 뜻은 ‘고려몽둥이(놈)’다. 어원은 고구려 멸망 후 전쟁포로와 난민들이 중국 본토로 대거 유입되면서 ‘몽둥이로 맞을 고구려 종놈’ ‘망국의 거지’라는 뜻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망국의 거지’라는 의미로서의 ‘꺼우리빵즈’는 구한말 독립운동 때문에 만주로 건너갔던 대다수의 조선인들을 지칭하는 말로 재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중국내 분위기 속에서 이른바 ‘홍위병의 난’으로도 불리는 65년부터 10여 년간 지속됐던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이 있었다.
그 역시 20대의 청춘을 사회격변기에 몸을 사리며 보내야 했다. 다행인 것은 한국 라디오 방송을 청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94년 한·중 수교가 되기 전까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몰래 들어야 했던 남조선의 ‘메아리 방송’이었다. 그녀는 이를 통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알게 됐다.
97년 12월, 한국 남자인 전주현 씨와 중매 결혼했다. 그리고 조상이 살았던 그리운 한국 땅에 왔다. 그런데 결혼생활 불과 3년 만에 고마운 남편은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또다시 혼자가 됐다. 한국에는 일가친척이 하나도 없었다. 2004년까지 식당 일 등 닥치는 대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그리고 그 해부터 그를 품어준 조국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세상에 홀로 남았지만 노인복지관이 있어 세상사는 재미 ‘쏠쏠’
이 씨는 보은군에서 12년 째 살고 있다. 최근에는 영구임대주공아파트에 입주하여 주거문제도 해결됐다. 국민기초생활수급자이자 노령연금 대상자인 그는 검소함만 있다면 무난히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는데 큰 문제는 없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조상들의 은덕으로 생각하고 있다. 중국에 있다면 꿈도 못 꿀 현실이다.
거기다가 보은군 노인장애인복지관의 고마움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칭찬일색이다. 오전에 복지관에 가면 젊은 직원들이 “안녕하세요!”라고 상냥하게 인사를 한다고 했다. 마치 친어머니에게 하듯 웃어른으로 깎듯이 대접해주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 ‘무한한 행복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월요일에는 ‘ 새 천년 건강 체조’ ‘라인댄스’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노래교실’에 참여한다. 화요일은 컴퓨터로 하는 문서작성, 엑셀을 배우고 있다. 중국에 있는 친지들과 인터넷으로 이메일을 주고받기도 한다. 수요일은 ‘요가’, 목요일은 ‘컴퓨터’, 금요일은 실버대학이 그를 맞는다. 그중에서도 특히 외래강사가 하는 건강, 인생, 현실 등에 대해 강의하는 금요일을 제일 좋아한다. 노년 생활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상식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한 주일을 이처럼 노인복지관에서 바쁘게 지내다보면 몸이 아플 틈도 없다. ‘노인복지관이 아니었으면 우울증과 치매현상도 찾아 왔을 것’이라며 요즘 안도의 숨을 내쉬는 그다.
이웃사촌이면서 동생 격인 강순애, 그는 ‘인생의 동반자’
그는 주말이면 개인 수영강사다. 고향인 중국 길림성 연길시 와 가까운 도문에서 한국으로 시집와 이웃사촌이 된 강순애(51)씨에게만 특별히 가르치기 때문이다. 순애 씨는 현재 기초수영반에서 강습을 받고 있지만 강습이 없는 주말엔 의자매 격인 언니 길자 씨에게 직접 지도를 받는다. 그러나 두 사람 실력이 ‘도토리 키 재기’라는 게 주위의 평가다. 수영을 먼저 시작했고 나이의 많고 적음 차이뿐인 것이다.
고향이 같은 중국이라는 점, 비슷한 시기에 한국인과 결혼하여 보은군으로 시집왔다는 점, 지나온 인생살이 또한 엇비슷하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는 언니 동생이 됐다. 특히 길자 씨가 독거노인이 된 이후, 생활터전마저 이웃이 된 뒤에는 친자매라 해도 믿을 수 있게 됐다.
“동생, 남편 2인 역할 하느라 바빠요” 순애 씨가 농담 삼아 말한다. 순애 씨가 말하는 남편 노릇은 결국 ‘벽에 못 박는 일’ ‘무거운 것 운반하는 일’ 등을 말한다. 물론 길자 씨도 순애 씨에게 무언가 언니 노릇을 하고는 있을 터다. 두 사람은 이렇게 서로 의지하며 인생의 동반자로서 한국에서의 여생을 보내고 있다.
길자 씨가 가장 좋아하는 애창곡은 바로 ‘울산 아리랑’이다. ‘까치들이 울어드니 님이 오시려나. 아 울산아리랑….’ 오늘도 그는 중국을 떠나 한국에서의 삶속에서 막연히 찾아와 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여생을 보내고 있다.
글/사진 최동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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