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첫 입국하던 날 하얀 눈이 펄펄 내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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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첫 입국하던 날 하얀 눈이 펄펄 내렸어요”
  • 최동철 편집위원
  • 승인 2009.11.12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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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범구, 투룸티 바투이 부부

▲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곧 첫눈이 내리게 될 것이다. 설희와 송희라는 이름처럼 두 딸은 눈처럼 하얀 마음을 간직한 채 예쁘게 성장해 갈 것이다.
2005년 2월22일.
신랑 한범구(42)씨가 베트남 신부 투룸티 바투이(26)씨와 동행하여 한국에 첫 입국한 날이다. 이 날 인천 국제공항엔 이들 부부의 결혼 입국을 축복이라도 하듯 하얀 함박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그것도 20여 센티가 쌓일 정도였다. 바투이 씨는 눈이란 것을 그 때 난생처음 보고 어루만져 보았다. 그래서 그 날의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범구, 바투이 부부의 큰 딸 이름은 눈 설(雪)자가 들어간 설희(5)다. 둘째 딸 송희(2)도 ‘눈송이’를 연상케 한다. 이렇듯 바투이 씨에게 있어 한국의 겨울은 매우 감성적으로 다가왔다. 벌써 겨울을 4번이나 지냈고 곧 다섯 번째 겨울맞이 채비를 하는 베테랑 한국주부가 다 되었지만 그녀의 뇌리에는 입국 첫해 받았던 한국의 겨울에 대한 강렬한 첫 인상이 자리를 잡고 있다.
친구에게 “나무나 풀이 다 얼거나 말라 죽은 줄 알았다. 그랬더니 봄이 오니까 모두 살아나 파릇파릇한 잎사귀가 나오고 꽃이 피어나더라.”고 실체적 체험담을 털어 놓은 것처럼 그녀에게 한국의 겨울은 충격이자 희망을 갖게 해준 동화 속 나라였다.

한국에 시집 온 날 난생 처음 본 눈, 애들 이름도 ‘설희’ ‘송희’
범구 씨는 올 해, 늦가을 들어서면 더 바빠지는 직업을 갖게 됐다. 보은군청소속 산불감시원으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산불 진화장비를 차에 싣고 다니며 산불감시는 물론 입산통제를 하기도 하고 농부들의 검불 태우기나 쥐불놀이도 주의를 주는 역할이다. 지난 2월에는 가족들과 함께 나들이 도중, 긴급출동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백석리 산불 현장에 출동, 진화작업에 착수한 적도 있다.
범구 씨는 5남매 중 막내다. 형과 누나들 모두 결혼하여 외지에서 생활한다. 범구 씨 가족이 어머니(안행근, 82)와 함께 살고 있는 산외면 길탕리는 충남 유성에서 86년 이사 온 이후 23년 째 살고 있다.
아직도 총명한 기운이 남다른 어머니는 웬만한 일은 직접 한다. 그러다가 지난 6월에는 그만 낙상하여 주위 식구들에 걱정을 끼친 적이 있다. 이 날도 허리에 복대를 감고 손녀 송희 봐주기도 하며 집 안팎 이곳저곳을 손보기도 했다.
“나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노총각 아들 밥, 빨래해주며 단 둘이 살다가 그 해는 농사일도 잘됐고 해서 다른 사람들처럼 베트남에 가서 맘에 드는 색시 한명 붙잡아 와라”며 “국제결혼을 독려했다”고 어머니가 사연을 설명했다.

10대 중반 식당 운영하던 부모님 잃고 집안 살림 챙겨
바투이 씨의 고향은 베트남 동나이(Dong Nai)다. 호치민에서 1시간 거리의 대규모 공단이 조성된 곳이다. 인구 200만 명 이상의 초대형 소비시장을 자랑하며 한국을 비롯한 수많은 외국 기업들이 몰려 있다. 신흥 관광단지로도 급부상하고 있으며 동나이 골프장에는 한국인이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라고 한다.
바투이 씨 부모는 이곳에서 ‘퍼(베트남 쌀국수)’식당을 운영했다. 그런데 바투이 씨가 15살 때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이어 1년 후 슬픔에 젖어있던 아버지마저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두 명의 오빠와 남동생 둘, 한 명의 여동생이 있었지만 자신이 집안 살림을 챙겨야 했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하다고 하는 사춘기 때 바투이 씨는 슬픔을 잊고 소녀가장이 되다시피 해야 했다.
예서 비롯된 어른스러움이 결국 범구 씨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2004년 겨울 맞선 당시, 다른 여성과는 다르게 바투이 씨는 수수해 보였다. 무엇보다 나이에 비해 성숙한 어른스러움이 범구 씨의 나머지 반쪽을 채울 수 있으리라는 느낌이 왔다.
사실 범구 씨는 26세 정도의 혼인대상자를 원했다. 그러나 베트남에서 이 나이는 노처녀에 속했다. 따라서 맞선 대상자 대부분은 18~20세 초반의 여성들이었다. 이러하니 어른스러움을 갖췄던 바투이 씨는 범구 씨의 눈에 당연히 군계일학(群鷄一鶴)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며느리 불편한 것이 많겠지만 그 만큼 가족은 편안하게 생활
바투이 씨는 어른스러움 때문인지 시어머니도 인정할 만큼 한국에 시집 온 이주여성 친구들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 원하든 원치 않던 친구들과 조촐한 파티를 자주 갖게 된다. 이 역시 베트남의 파티 문화다. 베트남은 한국과는 달리 넉넉한 시간 속에서 대화를 하며 모두가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갖자는 의미의 부담 없는 파티를 자주 갖는다. 우리 전통문화도 역시 예전에는 이러했지만 요즘은 세상의 각박함 속에(?) 미풍양속이 대부분 사라졌다.
바투이 씨는 또한 자타가 인정할 만큼 음식솜씨가 좋다. 특히 그녀가 요리한 ‘짜요(베트남 튀김만두)’와 ‘퍼(베트남 쌀국수)’는 장차 음식경연대회의 대상 수상을 예고할 정도다.
짜요는 다진 돼지고기, 상추, 숙주나물, 오이, 당근 등을 기름에 볶은 후, 이를 꾸온짜요섭(쌀로 만든 만두피)으로 감싼 후 또 다시 기름에 튀긴 음식이다. 퍼는 닭 국물 등에 쌀국수를 말은 것으로 우리나라의 잔치국수 개념이다.
“먼 외국에서 한국에 시집왔으니 며느리 본인은 불편한 것이 아주 많겠지요. 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며느리가 불편을 참고 어려움을 이겨내는 만큼 가족들은 편안하게 생활합니다. 그래서 며느리가 늘 고맙지요”
바투이 씨의 시어머니는 평소 마음에 소중하게 담아 두었던 말로 조용히 읊조렸다.


글/사진 최동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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