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식(삼년산 동호회장)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고죽군(孤竹君)의 아들로 형제간이다. 주(周)의 무왕이 은(殷)의 주왕을 치려할때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는 것은 인(仁)이 아니다'라고 만류하였으나 무왕은 마침내 은을 평정하고 천하의 종주국이 되었다. 이·제는 이를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고 은나라에 대한 절의를 지키기 위하여 주나라 곡식을 먹을 수 없다며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고 살다가 그 산속에서 굶어죽었다. 공자는 이·제는 인(仁)을 구하여 인을 얻었다고 극찬하고 있거니와 이들의 지조는 만고에 비길데 없는 의(義)로 후세 사람들의 사표로 높이 추앙을 받아오고 있다. 그러나 이·제가 수양산에서 채미(採薇)한 것을 구짖은 사람이 있다. 바로 사육신의 한사람인 성삼문(成三問)이다.
'수양산을 바라보면 이·제를 한하노라/ 주려 죽을 진정 채미도 하는 건가/ 아무리 푸새의 것인들 그 뉘따라 났더니'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난하의 이·제의 묘를 지나면서 그들의 의로움이 비록 일월같이 빛나지만 초목도 주나라 땅에 난것인데 차라리 굶어죽지 수양산 고사리는 왜 캐먹었느냐고 꾸짖고 있으니 그 기개가 돋보인다.
아버지는 물론 세아우와 네아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였으나, 세조는 그의 지조를 꺾지 못하였으니, 그의 호 매죽헌(梅粥軒)처럼 매화같이 희고 대쪽같은 지조를 지킨 그의 삶은 온 겨레의 마음의 귀감으로 추모를 받고있다. 조선왕조의 최대 폭군인 연산구에의 지조를 지킨 박삼길(朴三吉)의 삶 또한 우리들에게 감명을 준다. 보은읍 은사들 출신인 그는 무저항으로 자신의 소신과 지조를 지킨 것으로 유명하다.
성종때 윤씨를 폐비하려는 기미가 있자 신하로서 국모를 폐하려는 노의에 참여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병이들었다고 소문을 내고 문을 닫고 출입을 하지 않고 끝내 폐비여부를 논의하는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연산초에 회양부사로 나갔는데 이때 연산이 단상제(短喪制)를 시행하였는데 그는 아직 3년상을 못다치룬 상중이었다.
그는 임지에 가서 밀실에 아버지의 궤연을 만들고 남은 상기를 마쳤다. 그러나 연산은 페비때의 그의 행동이 고마워 문책하지 않았으나 임기를 마치고 낙향코자 고향으로 내려갈때 사람을 보내어 그의 짐짝을 수색하게 하였는데, 쌀되박과 간장병 그리고 조복 한벌밖에 없는지라 연산이 웃으며 "뭘 먹고 살려고 낙향하려 하는가?" 하면서 붙잡아 두고 오히려 대사간에 발탁하고 이어 병조참의 이조참판으로 승차시켜 주었다.
그러나 연산의 난정이 극에 이르자 다시 칭병하고 벼슬을 사임하였다. 박원종, 성희안 등이 반정을 도모할대 그에게 같이 참여할 것을 권하자, "지금 임금이 어질지 못하나 이미 그 임금에게 녹을 먹었고 이품 벼슬까지 지낸 터에 어찌 그 임금을 폐하는데 참여할 수 있느냐?" 하면서 정중하게 거절하고 표연히 낙향하였다.
반정후 평성군 박원종이 부렀으나, 응하지 않고 연산군에의 절개를 지키며 후학을 가르치는데 전념하니, 사람들이 '기로(耆老: 늙은이)선생'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고 한다. 보은읍 수정리 바깥수정마을 울창한 송림속에 있는 그의 묘비에서 이와같은 그의 행적에 대하여 우암 송시열은 이른바 주역에서 말하는 곧고 바름은 아름다움을 얻는다는 말씀을 지킨 것이라고 극찬한바 있듯이 비록 악군일지라도 임금에 대한 신하의 도리를 다한 것은 심오한 학문과 덕성에서 비롯되었으니, 가상한 일이다.
오늘날 자신의 영달을 위해선 지조와 신념을 헌신짝 버리듯하고 철새처럼 떠도는가 하면, 어제까지 몸 담았던 당과 모시던 총재에게 무차별한 폭언을 서슴치 않는 군상들을 보면서 이·제와 기로선생을 추모하는 것은 비단 나 뿐이겠는가? 하기야 대학가에서 정치가를 '말로 치 떨리는 사람들'로 풀이하고 있다니 할말이 없다.
<생각하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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