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공자들에 대한 ‘예우’가 실상은 어떠한 것이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임들은 나라위해, 우리는 임들 위해’ 매년 6월만 되면 보통사람들이 떠드는 말이다. 정부에서 그렇고 언론에서 그렇고 사람들의 의식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런 떠들썩한 세상사람들의 입방아가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남편을 잃은 부인에게, 아버지를 잃은 아들에게, 힘겹게 살고 있는 상이군경들에게는 그저 못마땅하기만 하다. “어렵게 살아온 인생살이를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어요. 죽지 못해 산 것이 죄지요” 눈물을 흘리는 유공자들의 한스러운 생활고(苦)는 죽음보다 견디기 힘든 한 맺힌 사연들이었다.
며칠만 지나면 6월25일. 모든이들이 한 번쯤은 숙연하게 지난날을 돌아보고 자유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날이다. 또한 그 속에서 6·25전쟁이나 월남참전으로 입은 온갖 피해를 되새기곤 한다. 그러나 한 번쯤 한 하늘아래서 피해 입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웃들을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최소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이 자유가 더욱 자유롭지 않겠는가.
보은군 국가유공자들은 상이군경회, 미망인회, 무훈회, 유족회로 구성되어 있다. 유족회(회장 최삼봉) 1백23명, 상이군경회(회장 한경호) 79명, 미망인회(회장 이순영) 60명, 무훈회(회장 김도식) 51명 총 3백13명의 회원들은 가슴에 묻어둔 상처가 세월의 무심함에 젖어 무뎌진 지 오래다. 그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매년 6월만 되면 호국영령이니 국가유공자니 하면서 난리법석을 떠는데 우리 그런거 하나도 바라지 않아요. 다만 국가유공자에 대한 내용규정을 확실히 해주길 바랄 뿐”이라는 한경호 상이군경회장(상이 등급 5급)의 질책에 새삼 가슴 뜨끔해짐을 느끼는 것은 피해자가 주는 한맺힌 목소리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의 존재를 잊고 누리는 자유의 소중함 때문이었으리라.
이들 회원들은 6·25이후 지금까지 40년 동안 보상금이라는 명목으로 받은 금액이 4백30만원 정도라고 한다. 이는 정부가 광주 민주화운동 희생자 유가족에게 이미 지급한 1천만∼2천만원의 보상금에 비교하면 엄청난 차액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국회에서 광주 민주화운동 보상법이 통과되면 적어도 1억원 이상의 보상금이 지급될 것이라는 관측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회원들은 광주 민주화운동 피해자 보상에 대해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민주화를 위해 희생된 만큼 그에 상응하는 보상금이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이지만 이에 비하여 국가유공자에 대한 연금수혜는 ‘너무 형편없다’는 것이 한결같은 지적이다.
그 동안 정부의 국가유공자 예우대책에 따른 기본연금을 보면, '87년 월 3만원이던 것이 '88년에는 5만원이었고, '89년 8월에는 월 8만원, 11월에는 12만원을 지급했다. 그러다 '90년 올해부터 15만원으로 인상하여 지급하고 있다. 따라서 회원들이 받는 연금은 기본연금 15만원으로 인상하여 지급하고 있다. 따라서 회원들이 받는 연금은 기본연금 15만원과 70세이상이면 받는 고령수당 3만원가지 18만원을 지급 받고 있는 실정이다.
18만원정도의 연금을 받고 있는 회원들은 대부분 70세 이상의 고령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일자리가 주어지기는 어렵다. 연금만 받아서 근근히 살아가는 것이 이들의 생활상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물가에 비할 때 눈물겨운 가계 꾸림이다.
6·25때 폭음으로 눈과 귀가 멀었고 팔까지 잃는 김용호씨(67. 보은 성주. 상이등급 1급)는 “혼자서 거동하기가 어려운 처지이기 때문에 간호수당도 받고 있다”며 “연금으로는 매달 보훈병원에서 약을 가져다 먹고 있지만, 턱없이 모자라죠. 가끔 아내가 무슨 약을 밥먹듯이 하느냐는 맘에 없는 핀잔이 두통을 가시게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또한 미망인회 이순영 회장(64. 내속 사내)은 “40년 동안 살아온 얘기는 눈물 흘리며 보낸 세월이라고 말할 수 있다”며 “1·4후퇴때 남편의 전사소식을 들었을 당시에는 시조부, 시어머니, 나, 아들까지 4대가 1명씩 4명만이 살았어요. 그러니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한 제 어깨가 얼마나 무거웠겠어요” 밤에는 길쌈하고 낮에는 남의 밭을 일구고, 땔감도 해서 파는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고 한다. 네 사람의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유족회 최삼봉 회장(74)도 “유족들의 연령이 70세이상이라 그들이 밖에 나가 일을 하면 무슨 일을 하겠느냐”고 반문하고는 “주는 연금이나 받아서 살고 있는 처지”라고 말했다.
유족회원중 전쟁터에서 맏아들과 셋째아들을 한꺼번에 잃은 이현희 할머니(73. 삼승 원남)는 “가슴속에 응어리진 한을 풀 수가 없어요. 그 애들을 생각하면 밥도 못 먹겠어요. 이렇게 늙은 에미는 호강하며 살고 있는데, 꽃다운 나이에 죽음을 맞았으니….”이 할머니의 한맺힌 사연을 지금 우리는 얼마나 성실하게 가슴에 새길 수 있는가.
잊고 살아왔다. 어쩌면 기억조차 하기 싫어하였는지도 모른다. “먹을 것도 없었으니 큰 아들을 국민학교도 마치지 못했어요. 가슴이 미어집니다. 아이 업을 포대기도 없었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어느 억만장자도 부럽지 않다”는 김용호씨 아내의 한스러운 항변.
“국가유공자라고 예우해 주는 것 같지만 사실상 우리는 그 ‘예우’로 인해 입는 정신적 피해가 더 크다”며 국가유공자에 대한 근본적인 내용규정이 필요하다는 이순영씨의 질책. “유공자들의 불만이 있다면 색안경을 끼고 대하는 일반인들의 매서운 눈총과 그동안의 보상대책이 너무 빈약했던 것”이라며 국가유공자에 대한 예우가 현실에 맞게 조정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한경씨의 무거운 어깨.
이들의 주장을 마주하였을 때, 그들에게 충분한 보상이 이뤄지지 못한 것과, 광주 민주화운동 희생자 보상문제와 비교했을 경우 국가 유공자들의 희생이 너무 가볍게 취급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열사 이○○의 묘’라는 6·25와 월남참전 희생자들에 대한 호칭의 정확성과 또한 그에 따르는 보상비 조정이 있어야 된다는 국가유공자들 지적이 결코 부당한 것은 아니다.
눈물로 한을 달래던 40년의 세월은 하얗게 핀 찔레꽃 덤불 속에 점점이 뿌려진 붉은 선혈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보낸 세상살이였으리라. 그것을 기억하는 마음가짐이 유공자들을 기리는 최소한의 예우가 아닐까. 매년 6월만 되면 우리들은 크게 외친다. 임들은 나라 위해, 우리는 임들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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