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지방문화를 선도했던 향교
상태바
과거 지방문화를 선도했던 향교
  • 송진선
  • 승인 1990.06.0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늘은 어떤 모습으로 서있는가
향교(鄕校)는 조선시대 시골에 있는 후학양성 교육기관으로 한 시대의 교육문화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갈래머리 딴 마을의 어린 학생들과 상투를 튼 젊은 어른에 이르기까지 ‘공자왈 맹자왈 하늘천, 따지…’훈장어른의 담뱃대 두드리는 가락에 맞춰 지식을 쌓던 과거에 비해, 오늘날 향교의 모습은 굳게 닫힌 문틈 사이로 바람소리만이 고요한 정적을 깨고 있을 뿐이다.

다만 보은 지역의 유림들이 매달 음력 초하루와 보름, 그리고 매년 음력 2월 초정(初丁)과 8월 초정에 대성전에 모셔져 있는 성현들에게 석존제(釋尊祭)를 재형하고 있을 뿐이다.

▲보은향교(전교 구연목)
보은 교사리 283번지에 위치한 보은향교는 충북 향교재단의 소유로 조선 세종때(1418∼1450) 창건되어 인조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를 했다. 명륜당과 대성전으로 구분되어, 명륜당에서는 교육을 받았고 대성전에는 옛 성현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현재의 명륜당은 고종 8년(1876) 당시 서원의 철폐령에 따라 외속 서원리의 상현 서원이 폐원하게 되자, 그 강당을 헐어 보은향교에 이축한 정면 3간, 측면 2간의 팔작지붕(네 귀마다 추녀를 달아서 지은 집)을 얹은 단층 목조건물이다.

그리고 대성전은 정면 5간, 측면 2간으로 3번의 중수를 거쳐 1972년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주향(主享)으로 양편에 언자(諺字),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의 4성(四聖)과 고자건(賈子蹇), 설중방(薛中方), 여자공(黎子貢), 위자공(魏子貢), 정자장( 子張), 위자로(偉子路), 오자유(吳子遊), 서자유(徐子有), 제자아(薺子我), 염경( 耕)의 10철(十哲)을 배향했다.

동편에는 주돈현(周敦賢), 정현(禎賢) 설총(薛聰), 안유(安裕), 김광필, 조광조, 이황, 이이, 김장생, 김집, 송준길의 위패가 있다. 또한 서편에는 정호(程顥), 주희(朱熹), 최치원(崔致遠), 정몽주(鄭夢周), 정여창, 이언적(李彦迪), 김인후, 성혼(成渾), 조헌, 송시열, 박세채등의 위패를 정향(庭享)하고 있다.

▲회인향교(전교 양재학)
회북 부수리 396번지에 위치한 충북 향교재단 소유의 회인향교는 조선 세종때에 창건되었다. 그러나 선조때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보은향교에 합하였다가 광해군 3년(1611)에 재건하였고 그 후 여러차례의 중수가 있었다.

옛 성현들의 위패가 있는 대성전은 정면 3간, 측면 3간의 맞배지붕(네모난 생철을 130°정도로 맞꺾어서 씌워놓은 모양의 지붕)으로 단층 목조건물이다. 공자를 주향으로 동, 서로 나누어 위의 보은 향교와 같이 위패를 정향하고 있다.

위와 같은 성현들을 모시고 있는 향교에서는 매년 여름방학때마다 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충효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교육내용은 인간이 지켜야할 최선의 예의범절, 서예, 그리고 한문을 강의하여 학생들에게 성현의 가르침과 예의바른 몸가짐을 스스로 익히게 하고 있다. 하루에 4시간씩 2주간을 실시하고 있는 이 기간에는 외속 서원의 상현서원, 수한 차정의 후율사, 마로 관기의 고봉사등의 유적지를 순례해 학생들에게 민족문화를 가르치고 있다.

“한문으로 자기 성이나 본관도 모르던 학생들이 교육을 받고 나면 이름도 잘 쓴다”며 “핵가족화 되다보니까 옛 것을 익히는데 소홀하고 또 등한시하는 것 같아요. 제사지낼 대의 진설법, 지방쓰는 법 등을 가르쳐주면 신기해하면서 잘 배우죠”라며 오히려 2주간의 교육기간이 적어 조금 더 늘렸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보은향교 전교 구연목씨는 말했다.

또한 회인향교 전교 양재학씨는 “회인향교는 회남·북 2개면을 관할하고 있어 규모가 적다”고 말하고는 “그렇지만 초·중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하고 있는 충효교실은 신청자들이 많아 해마다 계획인원보다 초과한 수강생을 맞아들여 지덕을 겸비한 유림들이 예의범절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 시를 논하고, 시대를 논하고, 세월을 논했던 학문의 전당 향교의 모습이 바로 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기억을 새롭게 하는 모습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시대 지역문화를 선도했던 향교의 위치가 오늘에 와서는 단지 성현들에게 예(禮)만 갖추는 형식에 지나지 않는 면이 있는 것은 아닐는지.

지역민들에게 명륜당을 소개하고 그것을 활용, 서예전과 시조제가 열리고, 음악이 흐르는 문화제 장으로서의 전환이 필요함을 느끼고 발길을 돌리는 순간, 대나무와 어우러진 솔바람소리를 가슴으로 싸안고 우뚝 서있는 향교의 이정표는 예나 지금이나 찬란한 빛을 여전히 발하고 있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