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반세기 기념특집 아버지 명예찾기 반평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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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반세기 기념특집 아버지 명예찾기 반평생
  • 송진선
  • 승인 1995.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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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회 충북지부장 변광수씨(보은농공고 교사)
8월15일 서울 광화문 앞에서 개최된 제 50주년 광복절 기념행사에 참석했던 변광수씨(55. 청주.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회 충북지부장. 보은농공고 교사) 그는 착잡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어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태평양전쟁에 포로감시원으로 강제 징용당했다가 일본이 패전하면서 연합군의 보복적 재판으로 인해 소위 전쟁 범죄자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자신의 아버지를 기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정부를 상대로 전쟁 범죄자가 무엇인지도 모를 그때부터 시작해 지금 광복 50주년을 맞을 때까지 아버지가 억울하게 짊어졌던 전범의 누명을 벗고 명예회복을 할 수 있도록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자신은 물론 가족들이 그동안 겪은 고통이 새삼 떠올랐기 때문이다. 싸움의 끝은 보이지 않지만 광복 50주년을 맞아 변광수씨는 끝가지 싸워서 아버지의 명예를 회북시키겠다고 자신과 약속을 한다. 또한 자신의 아버지와 같이 태평양전쟁에 강제 징용당했다가 희생당한 사람들의 많은 유가족들을 위해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일본과 싸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곧추세웠다.

■"아버지는 역사의 희생자"
변광수씨는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자신이 7살되던해 아버지와 함께 태평양전쟁에 강제 징용당했다가 살아돌아온 동포로부터 들었다. 자신이 쓴 죄를 인정하기가 어려운 변광수씨의 아버지는 여러차례 자살을 기도했고 사형장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숨을 거뒀다는 얘기까지 전해들었다. 청원군 북일면 비상리에서 영농에 종사하던 변광수씨의 아버지 변종윤씨는 21세때인 1941년 6월11일 일본으로 부터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연합군 포로수용소의 감시원으로 강제 징용당한 뒤 일본 패망후 연합군의 법정에서 포로학대죄로 전범 B, C급으로 분류돼 사형당했다.

포로감시원으로 함께 징용당했던 3천여명중 1백48명이 전범 B, C급으로 몰렸고 1백25명은 무기징역, 나머지 23명은 사형수로 변광수시의 아버지도 23명안에 포함돼 사형을 당한 것이다. 죄명이 포로학대죄이지만 연합군 포로를 감시한 일은 자원해서 한 것도 아니고 일본군이 포로에 대한 식량배급을 중단해 포로들이 기아에 허덕인 것이지 강제 징용당해 연합군 포로를 감시한 한국인이 포로를 학대한 것도 아닌데 일본 패전후 연합군치하에서 열린 재판은 공정하지 못하게 변종윤씨를 비롯한 한국인을 포로학대죄로 사형부터 무기징역까지 형을 내린 것이다.

국민학교 1학년때인 7살에 들었으니까 6년만에 겨우 아버지의 사망소식을 접한 것이다. 당시 변씨의 가족은 아버지가 살아돌아오길 바라는 증조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 본인 4명이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망을 믿지않고 어딘가에 꼭 살아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했다. 그러나 기다림, 희망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순간을 맞은 것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신경쇠약에 화병을 이기지못하고 돌아가시고 할머니와 어머니는 자신을 어떻게 해서든지 공부를 시키기위해 갖은 고생을 다했고 변씨도 대학교를 졸업한 것이 꿈만같다고 할 정도다.

그리고 변씨 하나만 믿고 청상과부로 평생을 보낸 어머니가 1981년 일본에 모셔져있던 아버지의 유골을 고향으로 모셔와 봉안하자 마음에 평화를 찾아 다소 편안한 생을 보내다가 사망했다. 1965년 한일 협정후 일본이 밝힌 태평양전쟁 희생자명단에 자신의 아버지 이름이 등재된 것을 보고 절망도 잠시 변광수씨는 아버지의 한(恨) 풀기 및 명예회복운동을 시작했다. 그 방법은 일본정부를 상대로 재판을 벌이는 일이었다. 한국 조선인 B, C급 전범자의 국가보상등 청구사건. 전쟁범죄자로 몰려 희생을 당한 아버지가 전쟁범죄자가 아닌 억울한 희생자이므로 그 희생에 대한 보상을 공식재판을 통해 당당하게 요구한 것이다.

■일본정부 상대로 재판
변광수씨는 아버지를 비롯한 전범자들의 명예회복 및 정당한 보상을 위해 자신의 생활의 30%를 할애할 정도로 이일에 매달려왔다. 그가 적극적으로 아버지의 사망을 추적해가기 시작한 3년후 1968년 그는 한 신문에서 일본의 독지가들이 태평양전쟁에서 희생당한 한국인 희생자를 위해 위령제를 지낸다는 소식을 발견했다. 일본의 전쟁책임을 어깨에 나눠진 한국 조선인 B, C급 전범자를 돕는회에서 마련한 위령제에 참석했던 변씨는 그곳에서 역시 전범자로 몰려 본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에서 거주하고 있는 동진회(회장 문태복)와 만나게 되고 그동안 이들과 함께 일본정부에 탄원서를 제출 배상을 촉구했다.

그러나 일본정부의 한결같은 답변은 65년 한일조약에 의해 일단락되었으므로 한국정부에 요구하라는 것만 얻어냈을 뿐. 그래서 변씨는 1975년 4월 하국정부에 '대일민간 청구권'을 내고 배상을 신청했으나 정부의 답변은 1945년 8월15일 이후에 사망했다는 이유로 반려되었다. 다시 같은해에 재차 청구권을 제출했으나 역시 수리를 거부당했다. 그래서 91년 11월12일 재일 전범자등의 모임인 동진회 회원 7명과 함께 일본 동경재판소에 조리(條理)에 기초를 둔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재판을 제소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이들은 우선 일본 수상이 전범희생자에게 일본을 대신해 복역했거나 사형을 당한 것에 대한 사죄장을 작성 회원들에게 교부해주고, 또 사형당한 희생자에게는 1인당 5천만엔씩 복역자에게는 하루 5천만엔씩 복역자에게는 하루 5천엔씩 보상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현재 이 재판은 15차까지 진행되었는데 1994년 12월19일 변씨는 일본을 방문해 그 동안의 실상을 낱낱이증언 자신의 아버지는 전범이 아닌 전쟁의 희생자이므로 일본의 사과와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4년여동안 법정 공방을 계속하고 있지만 일본정부에서는 움직임 전혀 없으나 일본내 양심가들은 자국이 태평양전쟁의 책임을 지고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을 해줘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나고 있다. 특히 일본의 양심가들로 구성된 '일본의 전쟁책임을 어깨에 맨 한국 조선인 B, C급 전범자를 돕는회'에서는 재판이 열릴 때마다 찾아와 용기를 주고 일본정부를 상대로 어떻게 싸워나갈 것인가 함께 머리를 짜내고 또 재판장에도 참석해 재판과정을 보고 대책을 논의하고 설명회를 가질 정도로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런가하면 이들은 자국의 수상에게 국가보상을 요구하는 요청서도 내고 이제까지 열린 재판의 속기록을 책으로 출판하는등 전범에 대한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도 해왔다. 변광수씨를 비롯한 동진회에서 일본정부를 상대로 제소한 재판의 최종 변론이 10월30일경 있고 올해 12월이나 내년초에 최종 결심이 있을 예정이다. 승소하기는 힘들것이라는게 대다수의 반응이다. 그러나 패소한다고 해도 실망하거나 중단하지 않고 계속해서 싸울 것이고 또 앞으로 한국정부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것인가와 정당한 보상도 요구할 생각이다.

또한 국내에서도 일부 국회의원들이 65년에 체결한 한일조약은 일본의 태평양전쟁에 대한 책임과 한반도의 강압적 식민지화에 대한 책임을 묻지않은 면죄부를 준것이라는 내용의 결의안을 지난 7월 황낙주 국회의장에게 제출하고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한 사죄와 반성의 뜻을 담은 한일조약을 재체결하자고 밝힌 바 있어 변씨는 여기에 줌목하고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있다. 지난해 MBC에서는 8·15특집으로 '전범으로 처형된 한국인'이라는 다큐멘타리를 제작, 유족대표로 변씨의 딸은 영양이 인도네시아 쟈카르타현지에서 현장을 추적 보도한 바 있다.

이와같이 전범에 대한 관심이 언론을 비롯 국내에서도 확산되고 있는 것에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범이 무엇인지 전범이 있었는지 조차 모른채 생활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유족들이 싸움을 포기하고 있는 상태이다. 태평양전쟁으로 많은 한국동포들이 강제 징용당해 무차별적으로 목숨을 잃었으나 아직까지 이에대한 정확한 진상 및 그에대한 책임, 배상등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변씨는 이런 기막힌 사연을 담은 사진전을 준비하고 있다. 전범으로 몰려 죽은 사람들의 명예회복 및 인식전환을 위해 동진회와 전범자를 돕는회와 함께 전범자에 대한 참상을 그린 사진전을 일본과 서울, 청주 등에서도 개최할 예정이다.

전범으로 몰려 이역만리에서 목숨을 잃은 23명의 희생자들의 유일한 자식은 자신밖에 없어 반평생동안 아버지를 비롯한 전범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명예회복 및 보상을 위해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싸움은 광복 50주년이 된 지금도 매듭을 풀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변광수씨의 아버지 변종윤씨가 겪은 일제의 고통이 변광수씨의 부인과 1남2녀의 가족들에게도 상흔으로 남아 광복 50주년을 맞은 8월15일, 기쁨과 서글픔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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