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영농으로 높은 소득 올려, 질 좋은 농산물로 U·R극복하자
"농촌이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농민은 질 좋은 농산물을 생산하고 소비자는 외국농산물 보다 농민의 피땀 흘려 생산한 질 좋은 우리 농산물을 애용한다면 UR파고가 아무리 높아도 하더라도 충분히 넘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북 상궁에서 영농에 종사하고 있는 이성용씨(44세)는 바로 이러한 소신을 갖고 충북에서 가장 훌륭한 농장을 설립하고 실현하기 위해 또 자신이 재배하는 작물이 전국에서 최고 아닌 세계에서 최고의 품질을 갖출 수 있도록 노력하는 성실파다. 1년의 영농 목표는 그동안 작성해 온 영농일지를 바탕으로 작목 및 소비량까지 감안해 재배 면적을 계산해서 세우기 때문에 실패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계획적인 영농으로 매우 높은 농업소득을 올리고 있다.
농민도 직업이라는 철저한 프로 의식을 가진 그가 농민의 된 것은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안 계신 증조부 슬하에서 어머니와 3남1녀의 형제들과 생활하면서 배움의 기회는 형과 동생에게 양보, 그들이 공직에 나간 대신 자신은 어른들을 모셔야 농토를 지켜야 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증조부가 한약방을 운영했기 때문에 이성용씨가 농사에 처음 손을 대서 지어본 것이 약초다. 이리 어른들이 약초에 대한 재배 기술을 익히고 있었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지을 수 있었고 작황도 좋아 수학의 기쁨을 맛보았고 비교적 윤택한 생활을 누렸다. 그러나 증조부가 별세, 가족이 보은읍으로 이사해 처음 2년간은 인쇄소를 운영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78년 친구와 함께 합작으로 사료 가게를 운영했다.
그러나 돼지는 버리고 소는 잡아먹을 정도로 축산시세가 나빠 빚만 잔뜩 지고 입던 옷 그대로 무일푼인 채 어머니가 홀로 농토를 지키고 있는 상궁으로 들어와 다시 약초 농사를 지으며 재기의 발판을 내딛었다. 천운인지 당시 시세가 좋아 재배해 놓은 약초는 끊임없이 주문이 들어왔고 더구나 83년 후계자로 선정되면서 그 자금으로 땅을 삭 그 곳에도 약초를 재배했고 배추, 고추, 콩 농사를 짓던 단순 농사를 복합영농으로 전환, 부농의 꿈을 일궈갔다.
게다가 91년에는 산업폐기물인 폐면을 이용 폐면 느타리버섯을 재배하면서 군내 농민들에게도 보급, 새로운 소득 작물로 부상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러면서 대 도시 농산물 도매시장과 유통정보원 등에 농축산물의 시세를 확보 자신이 재배한 농작물의 출하 시기를 효과적으로 조절, 손해보지 않고 팔 수 있는 방법도 터득했으며 매년 1천여평의 땅을 구입할 정도로 살림도 점차 불어났다.
증조부가 물려준 2천5백평의 농토가 8천여평으로 늘어났고 현제는 논 6천평, 밭 5천평, 호두나무 과수원 8천평에다가 임야는 3만3천여평 정도인데 이중 1만여평에눈 한우 비육을 위한 초기까지 조성해 농업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이제 농사를 좀 알겠다는 이성용씨는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며 농민들이 농업을 지킨다는 사명감으로 뭉쳐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이미 뜻을 함께 하는 내북면 농민 10명과 함께 영농조합 법인을 설립해 1차로 직판장을 개설하고 2차로는 느타리버섯, 한우, 기타 특용작물을 공동 생산, 공동 판매한다는 획기적인 계획까지 세워 놓고 있다.
이와 같이 항상 남보다 앞서는 생각으로 농촌발전을 위해 노력해와 그동안 국무총리상을 비롯해 농촌진흥청장상, 진흥원장상, 도지사상, 농협 새농민상을 수상한 바 있고 농민 후계자, 도 연합회장, 도정자문위원 UR 대체작목 협의회 위원을 지낸 바 있으며 현재는 내북면 새마을지도자협의회장, 내북농협이사를 역임하고 있다.
현재 충북대 최고경영자 과정을 밟고 있는 자신의 뒤에는 부인 김윤자씨(지도소내 군 생활개선 부장)의 헌신적인 내조와 정신적인 기둥 역할을 해준 어머니의 노력이 있었다고 말하는 그는 슬하에 1남2녀의 자녀와 함께 곧 실현할 충북에서 가장 훌륭한 농장을 가꾸기 위해 또다시 메마른 땅에 땀방울을 쏟는다.
<금주에 만난 사람>
저작권자 © 보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