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과 문화재 지킨 이 사람, 속리산 유격대원 당시 상황 기록 바램
해를 거듭할수록 6.25사변 일을 맞는 박용주씨(68. 내속 사내4구)의 가슴은 말 없이 착잡하다. 지역을 사수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속리산 민간유격대의 숨막혔던 공비 소탕작전을 기억들이 더욱 생생히 떠오를 뿐만 아니라 사지를 찢기 우고 동사한 체 이슬로 사라져간 동료대원들의 얼굴들이 마치 되살아난 듯 선명해져 오기 때문이다. 6.25사변이 끝난 후 험준한 산악을 끼고 있는 속리산 주변 마을에는 본 대에 합류해 후퇴하지 못하고 산 속으로 들어온 공비들이 출몰 민가와 관공서를 습격하는 위험 속에 살고 있었는데 이때 가족과 지역 법주사를 지키자는 뜻을 모아 분연히 일어섰던 것이 속리산 민간유격대이다.
이들 민간유격대원들은 전투 경험도 없었고 인민군들이 후퇴하며 버리고 간 총을 주워 무장한 것에 불과한 보잘 것 없는 민간부대였지만 지역을 지키겠다는 의지로 법주사 문화재를 방화하려 온 척후병을 사살하고 방어 귀중한 문화유산을 지키기도 하는 등 수없이 공비를 토벌해 가족과 지역을 지켰다.
이들 유격대원들은 대부분이 세상을 뜨거나 도시로 떠나가고 아직까지 지역의 파수꾼으로 남아있는 대원들은 겨우 여섯. 그나마도 유격대장이었던 김종성씨(78세)는 병상에 누운 지 오래고 나머지 대원들도 귀가 먹는 등 건강이 여의치 않고 노후생활이 빈곤에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어 그것이 박용주씨는 가슴 저미게 안타까울 뿐이다.
물론 시대 상황이 지역 사수의 역사적 사명을 안고 민간유격대원으로 산 속으로 떠나게 했지만 그래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역을 지킨 피의 댓가가 역사 속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감이 안타까울 뿐인 것이다. 당시 23세의 나이에 외동아들에 결혼까지 한 몸임에도 지역에 민간유격대원으로 출정,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던 박용주씨의 꿈자리를 지금도 어지럽히는 것은 동료대원들이 이었던 김만봉씨(생존시 69세)에 대한 기억이다.
눈이 무릎까지 싸이던 정월 초바위를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던 때의 적의 동행을 살피던 김씨가 발이 잘못 미끄러져 떨어지며 공비의 총에 맞아 죽었다. 그런데 공비들은 그 시신을 사지를 잘라 나무에 걸고 후퇴해 버렸는데 박용주씨가 이의 시신을 거둬 산 속에 장사를 지냈었지만 그 묘지를 찾을 길이 없어 더욱 안타깝다.
가족들은 모두 흩어지거나 죽고 이를 기억하는 박용주씨가 기억을 더듬어 묘를 찾아봐도 오랜 세월 속에 묻혀 흔적조차 없다. 앞으로 이 묘지를 찾아 공격을 적은 비석도 세워주고 또 6.25후 세운 낡은 충혼비(민간유격대원 혼령 모심)를 다시 세워 고인의 넋을 위로하고 후손들에게는 긍지를 심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또 남은 유격대원들이 세상을 뜨기 전에 당시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으면 하는 바램도 크다. 특히 요즘 같은 북한 핵문제로 인한 전시 위화감이 조성되고 있는 것에 대해 "6.25도 고관대작의 안일함과 해이해진 국민정신 때문에 꿈같은 당한 것입니다. 이 땅에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의 비극을 몰고 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사재기를 한다거나 동요하지 말고 맡은 바 위치에서 제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소방대장과 사내2구 이장을 8년 간이나 역임하며 6.25 이후에도 지역의 파수꾼으로 남았던 박용주씨는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잠시 고향을 떠났는데 행사으로 겨우 자리를 되잡아 4년전 고향 속리산으로 되돌아와 왕년의 동료대원들과 피를 나눈 형제처럼 노후생활을 다독거리며 살고 있다. 부인 장시화씨(58세)와의 사이에 3남2녀를 두고 있다.
<금주에 만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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