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읍 죽전리 김홍덕씨
상태바
보은읍 죽전리 김홍덕씨
  • 보은신문
  • 승인 1994.06.04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가난한 집 아들 택시사장 됐네, 아버지 전쟁으로 잃고 꿋꿋한 삶 일궈
전쟁의 댓가는 아버지의 희생만 줬고 세인들로부터는 정신적 위안조차 받지 못한 눈물겨운 시절을 의지로 버텨 자수성가한 김홍덕씨(49. 보은 죽전) 매년 6월말 되면 호국보훈의 달이라고 떠들 썩 해지는 사회가 탐탁치만 않으나 그 정도라도 생각해주고 조국애를 다시 한번 다지게 해줘 그나마 다행이라고 위안을 삼는다.

그러면서 요즘 나라사랑 정신이 희박해지고 있는데 "나라사랑이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아니겠느냐"며 정신적 재무장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김홍덕씨가 아버지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것은 슬하에 자신과 동생을 두고 전쟁 때 군복입고 총메고 외속리면 봉비리에 있는 집에 한번 왔다갔다는 것 밖에 없다.

그리고 시신도 못 찾고 달랑 날아든 전사통지서를 손에 쥔 어머니의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슬픔을 어린 나이에 지켜본 김홍덕씨는 하늘의 무심함을 처음으로 느꼈고 아버지를 앗아간 전쟁은 무서운 것이고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큰 결론을 얻었다. 그것은 공부하는데 많은 채찍이 되었고 나라를 위해 몸바친 아버지의 이름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어머니의 엄한 가르침을 받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크게 없지만 자랑스런 인물로 가슴속에 새겨놓기도 했다.

그러면서 없는 형편에 고등학교까지 진학시켜가며 고생하신 어머니를 호강시켜 주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특기였던 씨름을 살리기 위해 체육교사가 되고 싶었으나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진학이 어렵게 돼 대신 운전을 배웠고 졸업 후에는 화물차를 운전하여 일찌감치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남편을 잃은 어머니에게 손주를 안겨주고 생활의 안정을 찾기 위해 20살에 결혼, 비록 생활은 어려웠으나 가난 속에서도 행복을 일궈갔다. 게다가 아들까지 얻어 남부럽지 않는 생활을 하던 김홍덕씨는 하늘의 무심함을 또다시 느껴야 했다. 바로 내일 모레면 군입 대를 해야하는데 그동안 자신의 정신적 지주였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

시집온 지 1년가량 된 아내와 만1세도 안된 아들에 생활능력이 없는 할머니를 두고 군대를 가야했던 김홍덕씨는 그때 가장 뼈져리게 아버지가 없다는 슬픔을 느꼈고 군대생활이 외롭고 견디기 어려웠을 정도였다, 그러나 자신을 믿고 사는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슬픔을 씻고 꿋꿋하게 믿음직한 가장으로 다시 태어나야 했다.

그리고 생계수단이었던 운전을 계속하며 성실히 일하고 아내와 같이 알뜰하게 살림한 덕에 화물차를 구입했고 가족들이 건강을 걱정할 정도로 밤을 낮삼아 일을 했으나 살림 장만하는 재미에 피곤함도 모르고 지냈다. 남의집살이를 하면서 TV와 선풍기까지 있는 양옥집을 지어주겠다고 아내에게 약속했을 때 "그 날이 올까"라며 믿지 않는 아내에게 80년도에 번듯한 내 집을 지어 주었고 게다가 85년에는 자신의 소유인 논 8마지기도 마련했으며 지난해에는 개인택시까지 배정 받는 등 노력의 댓가가 차곡차곡 쌓여갔다.

더욱이 남의 입을 전전하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아버지가 최고라는 큰아들은 대학을 나와 공무원으로 재직하고 있고, 늦게 둬 이제 중학교 1학년인 막내아들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 이제 남 부러울게 없다고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소망이 뭐 있겠냐는 김홍덕씨는 그동안 고생만 한 아내 민순순씨(48세)와 두 아들과 암께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면서 서울 국립묘지 위령탑에 모셔져 있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가족들을 태운 택시의 페달을 밟는다.


<금주에 만난 사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