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북면 창리 임원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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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북면 창리 임원희씨
  • 곽주희
  • 승인 1994.03.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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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른 감회로 맞이하는 三一節
나라사랑 정신이 희박해져 3·1절을 휴일쯤으로 여기는 일반인들과는 대조적으로 3월1일 아침 깨끗하게 보관한 태극기를 게양하는 임원희씨(73. 내북 창리)에게는 3·1절을 맞는 소감이 남다르다. 자신의 아버지가 3·1운동 관련 국가 유공자여서가 아니라 선열들이 악랄한 일제의 고문을 당해가며 찾은 나라를 키우기 위한 노력이 부족하고, 내가 아니어도 누가 해주겠지 하는 심약하고 의타심이 강한 국민성에 안타까움이 먼저 든다.

그러면서 독립유공자인 선친의 고결함을 늘 마음에 새기기 위해 구가유공자 증서와 건국훈장 애족장 수여 증서 등을 깨끗한 액자에 넣어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고 매일매일 경각심을 갖는 임원회씨는 자식들에게 만이라도 나라사랑 정신이 확고하게 서도록 교육하고 있다. 독립유공자 후손으로서 자긍심을 갖도록 하고 하는 그는 자랑스런 선친을 다시 한번 떠올린다.

충남 병천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서울 한성 사범학교를 졸업, 전북 김제의 만경 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독립운동가 고 임창무씨가 독립운동을 벌인 것은 기미년 3·1운동 때. 당시 대한 독립을 위해 전 국토가 만세운동으로 들끓었던 3월10일경 고 임창무씨는 학생들에게 나라를 찾아야 한다고 교육하는 한편,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만경장터에서 학생, 주민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곧 경찰에 붙잡혀 3년 형량이 언도되었으나 고 임창무씨는 '내가 나라를 찾겠다는 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며 항소, 2년으로 형량은 감소되었으나 참기 힘든 고문을 받으며 형문소 생활을 보냈다. 그리고 석방된 고 임창무씨는 살길이 막막해지자 5남3녀의 자녀들을 데리고 처가가 잇는 청주 묵방리로 이사해 처가의 도움으로 목재상을 경영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병이 깊어져 그토록 원했던 광복을 지켜보지 못한 채 1943년 4월 나라 잃은 설움을 가슴에 안고 한 서린 눈을 감아야 했다.

독립운동을 한 가장 덕에 일제의 삼엄한 감시는 밤낮이 없었고 불시에 가택수사를 해 가족들을 놀라게 했으며 가족들이 외출을 할 때면 늘 감시자가 따라 다니는 등 고통이 심했다고 한다. 임원회씨의 부인 오경애씨는 "시어머니께서 심적 고통이 너무 컸던 때문인지 형무소 생활을 하며 쓴 일기 등 시아버지의 유품을 남김없이 태워버렸다"며 애석해한다.

더구나, 고 임창무씨의 독립운동 활약상을 가족들만 알고 있는 뿐 입증 받기가 어려워 임원회씨가 85년 부산에까지 가서 선친의 재판기록을 찾아 원호청에 국가유공자 지정을 신청, 선친의 독립운동이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다고. 그러면서 국가로부터 받은 연금이 아버지가 나라를 찾기 위해 애쓴 노력에 비하면 형편없지만 아버지가 자랑스럽고 자식들에게도 선친의 이름에 누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강조하고 있다고.

내북면 창리에서 거주하고 있는 임원회씨는 부인 오경애씨와의 사이에 3남1녀의 자녀들을 명예로운 국가유공자 후손으로 키우자고 노력하고 있다.


<금주에 만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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