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추단상(國秋短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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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추단상(國秋短想)
  • 보은신문
  • 승인 1992.10.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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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제(탄부 평각, 진영전기건설 부사장)
타향생활 20년에 어느덧 불혹(不惑)의 고개 마루. 인생의 훈장인 양 은발이 하나 둘 늘어만 간다. 흘러간 분노와 영욕의 시간을 뒤로하고 황금 물결 일렁이고 바람결에 미소짓는 코스모스 길을 헤치며 고향을 찾아 떠난다. 충청도 하고도 보은, 산수가 수려하여 옛부터 문객(文客), 미인이 많았던 곳.

차창으로 어른거리는 산하는 옛모습이 아니다. 어린 시절 추억이 서린 하천은 죽음의 여운이 검게 드리우고, 개발이란 미명에 상처의 골을 드리운 산허리는 아픔을 하소연 한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자리 매기이 잘 어우러져야 세상은 살만한 터전이 된다.

서구 문물의 충격은 풍요로움 만큼이나 이 강토를 멍들게 하였다. 반도체 산업의 발달이, 유전 공학이 대자연의 신비 앞에 도전장을 낸다. 설령 신과학 문명이 생명의 신비를 벗겨 버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사의 비극일 뿐이다. 맹자는 일찌기 "자연의 섭리에 순종하는 사람은 존재할 수 있으나, 자연의 섭리를 파괴하는 사람은 살아남지 못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환경 공해로 몸살을 앓고 있는 오늘을 미리 예견한 것일까?

우리 실생활의 저변에 연면히 흐르고 있는 유교의 서구 병에 시달리는 오늘날 서구인 조차 그 가치를 인정하는 훌륭한 사상이나, 우리는 그것의 소중함을 잊고 살아간다. 마치 안경을 끼고 안경을 찾는 사람처럼 문제 해결의 열쇠를 손에 쥐고 외래의 사상으로 풀어 보려는 우를 범하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근본정신은 사라지고 형식만이 남은 유학의 가르침은 생명력이 없다. 참된 배움이란 위기지학이다. 즉, 나자신의 것이지 남에게 과시하거나 곡학아세하는 현학이 아니다. 더불어사는 이 세상에서 참된 나의 모습을 발견하여 여러 사람들과 조화로운 모습으로 살아가자는 가르침이 유학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분수를 강조하고 남과의 조화를 위해 예(禮)가 요청된다. 뿌리가 썩으면 줄기와 가지가 무성하지 못하듯이 예의 근본정신이 없어지면 형식에 매여본들 아무런 소용이 없어지고 만다. 그 결과 극도의 물질적 이기주의만이 남아, 인간성이 매몰된 기형의 나만이 있게되고 인정과 도리는 설 곳이 없어진다.

인정과 도리가 없으니 우리는 삶은 냉혹해지고 불의와 탑협해버리고 만다. 냉랭한 기온은 옷섶을 여미게 한다. 포도 위로는 하나 둘 낙엽이 뒹군다. 풍요로운 결실을 흠상하며, 삶에 여윈 자신의 모습을 차안의 거울에 비춰보면 따스한 고향의 품으로 달려간다.


(생각하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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