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5년 일본에 의해 완공된 경부선철도의 최초 노선안에는 충북 보은이 포함돼 있었다.
부산~대구~안동~상주~보은~청주~진천~용인~서울 노선이었다. 부산 주재 일본영사 무로다 요시부미 일행은 1차 노선답사(1892년)에서 인구, 전답, 교통, 화물이 많은 지역을 우선시해 조선시대에 부산에서 한양까지의 지름길인 상주~보은~청주~진천을 거치도록 한 것이다.
경제논리로 볼 때 충북 한복판을 관통하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일본 군부의 개입하에 5차까지 진행된 답사와 측량에서 한국철도를 독점하고 대륙을 침략하기 위한 정치·군사적 야욕을 채울 노선으로 바뀌었다.
첫째, 영국과 프랑스에 이어 한국(대한제국)마저 경목선(호남선) 건설을 추진하자 일본은 “한국은 경부철도 지선 부설권을 외국에 양도할 수 없다”고 규정한 한·일 조약(경부철도합동,1898.9.8.)을 내세워 다른 나라의 철도부설권을 봉쇄할 목적으로 남한지역의 모든 철도를 경부선의 지선으로 설정해 버렸다. 그리고 경부선을 호남지역과 연결하기 용이한 서쪽방면 즉 충남도로 이동시켜 대한제국의 호남선 철도 계획마저 무력화시켰다.
둘째, 러일전쟁(1904-1905년)과 만주침공을 계획한 일제는 일본~한반도~만주를 최단 공사 기간과 최저 건설비로 연결할 수 있고 병참수송도 편리한 평지 지형을 선호했다. 이렇게 해서 1903년 충북 대신 충남 한복판을 지나는 천안~조치원~대전~김천 구간이 확정됐다. 당시 대전은 공주군 산내면 대전리(大田里)였으니 허허벌판에 철길을 부설한 것이다. 추풍령의 낮고 완만한 지형도 한몫했다.
한편 철도부설에 필요한 토지를 손쉽게 수탈하기 위해서는 안동, 상주, 청주, 공주 등 전통적인 고을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철도부설 과정에서 토지의 수탈과 강제노역에 저항해 일어났던 여러 고장의 항거는 이를 추측케 한다.
명분은 다르지만 공주 등 일부 유림들은 “과거 스승님이 중앙요로를 오가며 철도가 오는 것을 막아냈다”며 무용담을 자랑한다. 결국 경부축의 최단거리로서 충북의 중앙을 종단하는 서울~청주~보은 노선은 백지화됐고 우리나라 기차는 120년 동안 가까운 길을 두고 먼 길을 돌아 서울~부산을 오가고 있으며, 경부 고속도로마저 같은 노선을 모방해서 건설했기 때문에 자동차들도 먼 길을 돌아가고 있다. 게다가 일제는 서울~호남을 직접 잇는 철도를 봉쇄함으로써 국토의 균형발전을 가로막았다. 한국사회의 지역차별이나 지역불균형의 뿌리를 일본 제국주의의 경부철도 노선에서도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정부의 ‘5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에 청주공항~보은~김천노선 유치가 관철돼야 할 국가적 당위성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청주(청주공항)~보은~김천 구간을 신설하면 경부선철도를 건설(1905년)한 지 120년 만에 서울(동탄)~부산 간 최단거리 철도를 되찾게 돼 교통비와 물류비를 획기적으로 낮춤으로써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둘째, 오늘날 경부선의 서울-대전 구간은 물동량을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이다. 대전에서 갈라지는 호남선이 서울~대전 구간을 함께 쓰기 때문이다. 이는 120년 전 일제가 한국철도를 독점하기 위해 호남선을 경부선의 지선으로 만든 후유증이다. 따라서 국토의 중앙을 통과하는 새로운 남북철도가 절실하다.
셋째, 장차 청주공항에 민간 활주로가 건설되면 국토의 중앙에 위치한 청주공항은 우리나라 화물과 여객운송의 허브가 되며, 따라서 부산~보은~청주공항~서울 노선은 기업과 국민이 선호하는 황금노선이 됨으로써 기업경쟁력은 물론 지역 균형발전에도 이바지할 것이다.
넷째, 앞으로 북한을 거쳐 유럽까지 가는 유라시아철도를 개척하게 되면 일본과 동남아시아의 물동량이 부산에 폭증할 것이며 그때를 대비하여 부산~서울 간 최단거리의 새로운 철도노선 확보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