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경 선생
정운경 선생(1861. 2∼1939. 2)은 송강 정철의 후예로 제천 출신이다. 을미사변이 발발하자 거의해 의암, 유인석 의진에 참가해 1896년 1월 중군장에 임명돼 충주성을 점령하고 청풍, 평창 등지에서 적당수령(賊 首領)을 참수해 전공을 세웠다. 3월에 전군장 홍대석이 사임하면서 정운경을 천거하므로써 전군장겸 전군군사사(前軍軍事師)에 임명돼 충주, 제천 등지에서 적군과 교전했으며 원주 대평교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후 의진은 일단 해산됐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이에 조약 무효를 부르짖으며 거의한 원용팔이 9월에 체포되고 의진이 해산됐으며 박정수의 거의도 실패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접하고 단양일대에서 이규석, 김홍경, 지원영, 김지현, 정해훈 등과 더불어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정운경은 의진의 부서를 정하고 인근 각지의 지사들과 연락을 취하며 대일전투를 준비했다. 그러나 전투태세가 정비되기도 전에 원주 진위대의 불의의 습격을 받아 장병들이 흩어지고 정운경은 영춘에서 그리고 함께 거의했던 의당 박정수는 청풍에서 각각 체포되니 의진은 다시 무너지고 말았다.
이에 군부로 압송돼 엄중한 심문을 받다가 1905년 11월 평리원(平理院)의 재판을 거처 유배, 15년형에 처해져 1906년 10월 황주(黃州) 철도(鐵島)로 유배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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