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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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恨
  • 오계자(보은예총 회장)
  • 승인 2024.04.18 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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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약속도 없고 스케줄도 없는 날이다. 일 없이 무언가를 기다리며 현관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가 하면 자꾸만 힐끔 힐끔 대문 쪽으로 눈이 가는 내 행동이 나 자신도 웃음이 나왔다. 봄 타는가? 자연스레 휴대폰도 손에서 놓지 않고 쥐고 있던 차에 낯선 번호의 전화가 왔다. 망설임 없이 통화를 했고 만났다. 그분은 자서전을 의뢰하셨고 원하는 내용이 내가 단편 소설을 구상하고 있던 사연이라 반가웠다. 
한국전쟁 전후에 있었던 부역이네 보도연맹이네 하면서 전국적으로 너무도 잔인하게 양민학살을 한 사건들을 알게 되면서 그 유족들의 삶을 소설화 하고 싶던 중이었다. 그러던 차에 모 지역 유가족회 회장님을 뵙게 되었으니 하도 반가워서 살갑게 인사했다. 첫눈에 그분은 품위가 외모에 나타났다. 퇴계 이황선생의 후손이며 대종가 종손으로 대접받던 가문이 하루아침에 추풍낙엽 되어 조선시대 평민보다 못한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살아 온 삶이 참으로 애틋했다. 
70년이 넘도록 사상범의 후손이라는 올가미에 옥죄이며 이방인 취급당하는 고통으로 살아야 했다. 초등학교 입학하는 날부터 평생 들어 온‘빨갱이 아들’이라는 올가미에 씌워져 취직은 먼 나라 불구경이었다. 심지어 종가의 논밭을 경작하는 농민들도 마을 주민들의 눈치를 살필 정도였단다. 
당시 경성제대 다니던 부친께서 전쟁으로 인해 학교는 무기한 휴강이고 열차도 버스도 군인 수송용으로 동원되었으니 피난민들과 같이 경북에 위치한 댁까지 걸어서 오셨단다. 하지만 겨우 집에 도착했는데 부모님도 아내도 경찰서에서 찾더라며 빨리 피하라고 등 떠밀어내니 네 살배기 이분의 눈에는 보고 싶었던 아버지가 한없이 가엽더라고 했다. 그래도 부친께서는“내가 지은 죄가 없는데 왜 숨느냐”며 직접 지서에 가서 학교가 휴강이라 귀가했노라고 나를 왜 찾았느냐고 신고를 했단다. 인민위원장 호칭을 받을 만큼 인민에 부역을 했다는 죄목으로 그 자리서 체포 되었다. 다음날 동네 앞 이름 없는 골짜기서 총살 달했다고 말씀하시며 입이 마르고 가슴이 벅차서 말을 잘 잇지 못하셨다. 
2013년 9월 13일 고등법원에서 그 지역 부역혐의 희생자 50명이 승소를 했단다. 70평생 짊어진 억울한 누명을 벗었는데 자신은 매가리가 쫙 풀려서 주저앉았단다. 가슴은 더 답답하고 더 분하고 감정을 주체를 못하겠더란다.
가족들의 일평생을 말로 표현 하려니 입이 바싹 마르고 가슴이 벅차서 말을 잇지 못하시고 물 잔이 떨리고 있다. 공무원은 언감생심이고 대기업도 서류접수조차 신원조회에 걸려 삶의 의욕이 꺾였단다. 신원조회, 신원조회라는 단어가 철천지한이 된 분이다. 직계가족도 아닌데 친척 조카가 면사무소 사환으로 있다가 빨갱이 친척이라고 쫓겨나야 했단다. 양반가문의 대종가는 문디 피하듯 외면을 당해야만 했단다. 한평생 더러운 거적때기 누명 벗으려고 몸부림쳤는데 벗고 보니 서러움이 솟구친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힌다. 
양민학살 인정한다. 미안하다. 보상금 몇 푼주는 정부는 참 쉽구나. 이분들의 일평생은 어디 가서 찾을꼬. 히틀러의 유태인 대학살 홀로코스트는 세계사 시간에 들었는데 우리는 한국판 홀로코스트를 모르고 살았다. 왜일까? 4.19의거 때 반짝 기자들 틈에서 나오다가 군사 쿠데타에 밀려 묻혀버렸다는 사실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나마 공소시효에 걸려 법원에 접수조차 안 된 유가족들은 명단에도 오르지 못해 위령제에도 참석 못하고 더 한이 될 것 같다. 그냥 그분들도 정부에서 인정 해주면 좋겠다. 낮에는 국군에 시달리고 밤에는 빨치산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닭 잡으라면 닭 삶아주고, 돼지도 잡아 먹이던 그 군인의 손에, 국민 지키라고 쥐어준 총으로 학살당했다. 법도 자기네들 필요할 때는 이현령비현령이더니 이럴 때는 철저하다.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다 아픔만이 흔적으로 남는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우리들의 아픔이 언제면 끝이 될까. 한국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벅차지만 국내에서도 호시탐탐 노리고 있음을 명심하고 정신 차려야 할 때이니 제발 우리끼리 적이 되지 말고 하나가 되면 좋겠다. 이번에 당선된 국회의원님들께 부탁하고 싶다. 상대의 흠집 찾기에 혈안이 되지 말고 정책연구에 몰두해주시길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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